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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02화

테세우스의 배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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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이를 닦는다. 저녁에 다시 거울 앞에 서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거울 속 얼굴은 여전히 나다. 하지만 그 사이 내 몸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십억 개의 세포가 죽고, 또 수십억 개의 새로운 세포가 태어났다. 장 속 상피세포들은 이미 몇 번이고 갈아치워졌고, 피부 표면의 각질세포들은 끊임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면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나는 정말 같은 사람일까?

이 질문은 더 거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몸의 많은 세포들이 지속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정확한 주기와 범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미래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유명한 철학적 퍼즐, '테세우스의 배'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는 간단하다.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섬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돌아온 배를 아테네 사람들이 기념으로 보존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썩은 널빤지를 새 것으로 교체했고, 결국 모든 부품이 바뀌었다.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이 고민은 철학자들을 2,500여 년간 괴롭혀왔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다만 배는 외부에서 부품을 교체하지만, 우리 몸은 스스로 내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재건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대 생물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 몸의 세포 교체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하루에 약 330억 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죽는다고 추정된다. 이 중 대부분은 혈액세포와 장 내벽 세포가 차지한다. 다만 각 기관마다 교체 속도가 다르며, 일부 세포는 평생 교체되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 연구들의 결론이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정체성이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개인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간을 넘나들며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물질적 연속성: 같은 물질(몸)을 가지고 있으면 같은 사람이다. 심리적 연속성: 같은 기억과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같은 사람이다. 영혼의 연속성: 불변하는 영혼이 있어서 같은 사람이다.

각각을 차례로 검토해보자.


물질적 연속성 이론부터 살펴보자. 이 관점에서는 내 몸이 곧 나다. 같은 뇌, 같은 심장, 같은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포 교체 사실만으로도 이 이론은 곤란해진다. 내 몸의 상당 부분이 몇 년 사이에 바뀐다면, 나는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더 극단적인 사례를 생각해보자. 만약 의사가 내 손을 절단하고 의수를 달아준다면, 나는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 걸까? 신장이식, 심장이식을 받은 사람들은 어떨까? 만약 뇌 이식이 가능하다면, 내 뇌를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했을 때 '나'는 어느 쪽에 있을까?

직관적으로 우리는 뇌 이식 후에도 '나'는 내 뇌가 있는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몸 전체가 아니라 뇌가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뇌조차 완전히 불변하지는 않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뇌의 경우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뇌의 뉴런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교체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의 연구는 이 믿음에 도전하고 있다.

성인의 해마에서 새로운 뉴런이 생성된다는 증거들이 발견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과학계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연구는 성인 해마에서 활발한 신경세포 생성을 보고하는 반면, 다른 연구는 이를 부정한다. 확실한 것은 뇌의 대부분 영역에서는 뉴런 교체가 매우 제한적이거나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뉴런이 교체되지 않는다고 해서 뇌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뉴런들 사이의 연결(시냅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신경 연결을 만들고, 사용하지 않는 연결은 약해진다. 뇌는 고정된 하드웨어라기보다는 계속 업데이트되는 소프트웨어에 가깝다.

그렇다면 물질적 연속성으로는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 심리적 연속성은 어떨까?


17세기 철학자 존 로크는 개인의 정체성이 연속된 기억에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경험을 한 사람과 지금의 나는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포가 모두 바뀌어도 기억이 연결되어 있는 한 나는 여전히 나다.

로크의 이론은 직관적으로 매력적이다. 우리는 실제로 기억을 통해 자신의 연속성을 느낀다. 어린 시절의 추억, 첫사랑, 중요한 결정들의 순간들이 연결되어 지금의 나를 만든다.

하지만 로크의 이론도 문제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반박이 토마스 리드의 "용감한 장교" 사례다: 한 소년이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 성장해서 용감한 장교가 되었고, 그때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나이 들어 장군이 되었을 때는 장교 시절은 기억하지만 소년 시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로크의 이론에 따르면 소년과 장교는 같은 사람이고, 장교와 장군도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소년과 장군은 다른 사람이 된다.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다:


우리는 유아기 기억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3살의 나와 30살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으로 기억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닐까?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되고 왜곡된다. 잘못된 기억도 정체성을 구성할까?



기억만으로는 부족하다면, 더 넓은 심리적 특성들은 어떨까? 성격, 가치관, 사고방식, 감정 패턴 등 말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 20대의 나와 50대의 나는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를 수 있다. 심한 경우 뇌손상이나 정신질환으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유명한 사례가 1848년 피니어스 게이지다. 철도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뇌에 철봉이 관통한 후,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친절하고 책임감 있던 사람이 무례하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종교적 관점에서는 불변하는 영혼이 정체성을 보장한다고 본다. 몸은 변하고 기억도 변하지만, 영혼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실제 경험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약 영혼이 모든 경험과 독립적이라면, 그것이 정말 '나'와 관련이 있을까?


그렇다면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정보 이론적 관점이 도움이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생각해보자. 같은 프로그램을 다른 하드웨어에서 실행해도 여전히 같은 프로그램이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 재료가 아니라 정보의 패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체성도 특정한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패턴의 연속성에 있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DNA는 세포분열 때마다 복사되어 전달되는 '설계도'다

뇌의 신경망은 기억과 성격을 저장하는 '패턴'이다

면역계는 과거 감염 정보를 기억하는 '학습 시스템'이다


물질은 계속 바뀔 수 있지만, 정보는 복사되고 전달되면서 연속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왜 패턴의 연속성이 정체성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패턴 연속성이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여러 강력한 근거가 있다:


1. 인과적 연결성 우리의 현재 상태는 과거 상태의 직접적 결과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에서 발생했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에서 발생할 것이다. 이런 인과적 연결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한, 정체성도 유지된다.

2. 기능적 연속성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면 같은 시스템이다. 내 뇌가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같은 패턴으로 반응하고, 같은 종류의 기억을 처리한다면, 물질이 바뀌어도 기능적으로는 같은 시스템이다.

3. 경험의 연속성 의식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느낀다. 이런 주관적 경험의 연속성이 정체성의 핵심이다.

4. 타인의 인식 다른 사람들은 나를 계속 같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사회적 정체성의 연속성이 개인적 정체성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앞서 제기한 어려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치매 환자의 경우: 치매는 패턴의 점진적 해체 과정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패턴이 손상되면서 정체성이 약화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다.

성격 변화의 경우: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례에서도 그는 여전히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언어 능력도 유지했다. 성격은 바뀌었지만 모든 패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체성의 일부는 변했지만 핵심적 연속성은 유지되었다.

기억 상실의 경우: 기억을 잃어도 학습된 습관, 기술, 반응 패턴은 남아있다. 명시적 기억(explicit memory)은 사라져도 암시적 기억(implicit memory)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더 근본적으로 접근한다. 애초에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process)이지 고정된 실체(substance)가 아니다.

"나"라고 부르는 것은 오온(五蘊) - 색(물질), 수(감각), 상(인식), 행(의지), 식(의식) -이 일시적으로 결합한 현상일 뿐이다. 마치 강물이 계속 흐르면서도 '한강'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우리도 변화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연속성을 갖는 존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테세우스의 배 문제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같은 배인가, 다른 배인가'를 묻는 대신, 배라는 것 자체가 부품들의 일시적 결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도 실용적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연속된 자아를 전제로 살아간다. 법적 책임, 도덕적 의무, 인간관계 모두 정체성의 연속성을 가정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물리적 시간에서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세포는 죽고 태어나고, 원자들은 음식과 호흡을 통해 들어왔다가 배설과 땀으로 빠져나간다. 물질적 측면에서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당히 다른 존재다.

심리적 시간에서는 기억과 경험이 연속성을 만든다. 어제의 결심이 오늘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반응에 영향을 준다. 의식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사회적 시간에서는 타인들이 나를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대한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는 연속된 책임을 지는 주체다.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같은 관계를 지속한다.

생물학적 시간에서는 DNA와 후생유전학적 변화가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만든다. 유전자는 대체로 불변하지만, 그 발현 패턴은 환경과 경험에 따라 변한다.

이 모든 층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이런 철학적 논의가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1. 성장과 변화에 대한 태도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이해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도와준다. 우리는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일 수 있다.

2. 과거와의 관계 과거의 실수나 상처가 현재의 나를 완전히 규정하지 않는다. 패턴은 변화할 수 있고,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연결을 만든다.

3. 타인에 대한 이해 다른 사람들도 변화하는 존재라는 인식은 관용과 이해를 높인다. 과거의 행동으로 누군가를 영원히 규정하지 않을 수 있다.

4. 죽음에 대한 관점 물질은 사라져도 패턴과 영향은 계속된다. 우리가 타인에게 남긴 기억, 영감, 변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연속성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강물은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강은 강일 수 있다. 물이 멈춘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강이 아니라 호수가 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다. 세포가 교체되고 생각이 바뀌고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동시에 그 변화의 과정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테세우스의 배가 모든 부품을 교체한 후에도 테세우스의 배인 이유는, 그것이 테세우스의 모험을 기념하고 아테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의미'의 연속성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포를 모두 바꾼 후에도 우리인 이유는, 우리 안에 흐르는 기억과 의미, 관계와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 끊어지지 않는 인과적 연결의 사슬 때문이다.


결국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과거의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나 안에 패턴으로, 기억으로, 습관으로, DNA로, 그리고 무엇보다 인과적 연결로 새겨져 있다. 동시에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현재 속에 잠재되어 있다. 오늘 내가 하는 선택들, 먹는 음식들, 만나는 사람들, 읽는 책들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미래의 나를 창조하는 작가이자 동시에 과거의 나에 의해 창조되는 작품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하지만 생물학적 존재로서 우리에게는 다른 명제가 더 적절할지 모른다. "나는 흐른다, 고로 존재한다." 변화가 곧 존재의 증명이고, 흐름이 곧 정체성의 본질이다.

그러니 내일 아침 거울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제와 다른 세포들로 이루어진 이 몸, 어제와는 조금 다른 경험을 쌓은 이 의식, 그럼에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이 기억들과 패턴들. 모든 것이 변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대로다. 이것이 살아있다는 것의 아름다운 역설이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흐름 속에서 영원을 만난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281545414198083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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