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노답론 06화

무지개의 끝

by 레옹
d44193c8817725ce88a6c3d2ff390ec8.jpg

과연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것을 쫓는 행위가 무의미할까? 아니면 바로 그 불가능성이 우리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나는 어릴 적, 비가 갠 뒤 무지개가 뜨면 동네 어귀를 벗어나 보물섬 지도를 든 탐험가처럼 무지개의 끝을 향해 달렸다. 황금 항아리를 상상하며 숨을 헐떡이고, 진흙탕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려갈수록 무지개는 더 멀어졌고,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끝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무지개의 끝'이라는 철학적 딜레마의 핵심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행동에 과연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는 철저히 결과 중심의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학 입시에서는 합격 여부만이 중요하고, 취업에서는 최종 선발만이 의미를 갖는다. 기업에서는 매출과 수익이 모든 것을 판가름하고, 정치에서는 선거 결과가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올림픽에서도 금메달리스트만이 기억되고, 은메달리스트는 "아쉽게 놓친" 사람으로, 동메달리스트는 "그나마 메달을 딴"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결과 중심주의는 효율성을 가장한 폭력이 될 때가 많다. 과정의 가치를 짓밟고, 수많은 숨겨진 노력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완벽한 결과 앞에서만 환호하고, 그 뒤편의 땀과 눈물은 외면하곤 한다. 실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창의성을 저해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심화시키며, 결국 개인의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

하지만 이 잣대는 무지개의 끝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마치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한 마라토너의 42.195km 여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된다. 따스한 햇살 아래, 손을 맞잡고 걷는 산책길. 나뭇잎 스치는 소리, 잔잔한 새소리, 그리고 서로의 시시콜콜한 농담 속에서 우리는 목적지에 닿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했다. 발밑에 밟히는 낙엽의 바스락거림조차도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과정의 일부가 된다.

예술가가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든 순간부터 마지막 터치까지, 그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몰입과 영감은 완성품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부모가 자녀의 첫걸음을 기다리며 보낸 수없는 밤들, 그 기다림 자체가 이미 완전한 행복이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과정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존재다. 무지개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여정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예상치 못한 풍경을 발견하며, 동반자와의 깊은 유대를 형성한다. 목표 달성 여부와 관계없이,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동시에 두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결과에 따른 평가를 피할 수 없고, 인간적 존재로서는 과정의 가치를 포기할 수 없다. 이 이중성은 현대인에게 깊은 내적 갈등을 안겨준다.

취업 준비생은 매일 밤 '이 모든 노력이 합격이라는 달콤한 열매로 이어질까?' 불안해하면서도, 동시에 '이 힘든 과정 속에서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다독인다. 합격 통지서 한 장으로 정의될 수 없는 수많은 밤의 고뇌와 자기 성찰이 그들에게는 이미 소중한 결과다.

연구자는 논문 발표라는 성과를 목표로 하지만, 진리 탐구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느끼는 지적 흥분과 깨달음이 진정한 보상이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꿈꾸면서도 새벽 훈련장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에서 진짜 성취감을 맛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두 가치 체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에 대한 명확한 답은 존재할까? 철학사를 돌이켜보면,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근본적 물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잘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하며 과정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덕의 실현이라는 결과적 요소도 강조했다. 칸트는 의무 윤리학을 통해 과정의 중요성을 부각했지만, 공리주의자들은 결과의 유용성을 더 중시했다.

하지만 이 딜레마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접근일 수 있다. 현실에서는 좋은 과정이 나쁜 결과로, 나쁜 과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선량한 의도로 시작한 사회 개혁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기도 하고, 부정한 수단을 통해 얻은 성공이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의 복잡성 앞에서 과정과 결과를 단순히 상호 보완적 관계로만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열쇠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과정을 결과로, 결과를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말이다.

삶을 하나의 긴 여행이라고 할 때, 우리가 흔히 '도착지'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다음 여정의 '출발지'에 불과하며, 그 여정 속에서 겪는 모든 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채워가는 보물 상자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들 - 노력, 성장, 깨달음, 관계 형성 - 이것들이야말로 진정한 '결과'가 아닐까? 반대로 우리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들 - 합격, 승리, 성취 - 이것들은 사실 더 큰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취업에 성공한 순간을 예로 들어보자. 사회적으로는 이것이 '결과'다. 하지만 개인의 인생 전체로 보면, 이는 새로운 성장과 도전의 '과정'이 시작되는 출발점일 뿐이다. 반대로 취업 준비 기간 동안 쌓은 인내, 자기 이해, 인간관계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결과'이며, 평생에 걸쳐 지속될 소중한 자산이다.

무지개의 끝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꿈을 품고 도전하는 삶의 '과정'이다. 반면 여행 중 만난 풍경, 느낀 감동, 깨달은 진리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결과'다. 도달하지 못한 목적지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값진 성취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은퇴한 노인이 "내 인생은 실패였다"고 한탄할 때, 우리는 그에게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이 일궈낸 모든 관계, 극복한 모든 시련, 나눈 모든 사랑이 바로 당신 인생의 진정한 결과라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조차 새로운 지혜와 경험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사회적으로는 효율성과 공정성을 위해 명확한 기준점이 필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관점의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결과'를 추구하되, 그 과정에서 얻는 모든 경험을 진정한 '결과'로 인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회적 '결과'는 더 큰 삶의 '과정' 중 한 단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전환은 우리를 좌절과 자만 모두로부터 해방시킨다. 실패했을 때는 그 과정에서 얻은 성장과 깨달음이라는 '결과'에 주목할 수 있고, 성공했을 때는 그것이 새로운 도전의 '과정'일 뿐임을 기억할 수 있다.


무지개의 끝을 쫓는 여정은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동시에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었다.

무지개의 끝을 추구하는 것이 가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제 혁신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다. 그 추구 자체가 이미 도달한 결과이며, 동시에 그 결과는 더 큰 여정의 한 과정이라고 말이다.

이 관점의 전환은 딜레마 자체를 해체한다. 과정과 결과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강요에서 벗어나, 우리는 각각을 다른 시간적 프레임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짧은 시간 안에서는 과정이, 긴 시간 안에서는 결과가 될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명확한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 아니라, 명확한 답은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진정한 답이다. 무지개의 끝을 찾아 헤매는 모든 순간이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성취이며, 동시에 더 큰 삶의 서사 속 한 장면인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kr.pinterest.com/pin/647251777732824981/)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5화데카르트의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