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뜨는 것의 전략적 의미

by 지여다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논리가 닿지 않고, 감정은 소진되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가 있다.
언어적 대응만으로 경계를 유지하지 어려울 때, 침묵과 이탈은 그 대안이자, 자기 결정권의 고차원적 표현이 된다.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나는 이 구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된다. 이는 가장 명확하고 근본적인 자기 보호 방식이다.

관계의 경계는 흔히 언어를 통해 형성되고 유지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계를 말로 설정하는 전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그 언어가 작동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비언어적 전략을 제시한다. 여기서 이탈은 회피가 아니라 구조적 분석의 결과이며, 침묵은 수동성이 아니라 관계의 종결에 내린 판결이다.

‘자리를 뜬다’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확한 기준의 표현이다.
이 자리가 나의 존엄을 침해하거나, 감정적으로 소모되기 시작할 때, 나는 떠날 권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휘말리지 않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흔히, 관계에서 떠나는 사람이 소외되고 패배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구조의 외부를 재설계할 수 있다. 머무는 사람은 기존 질서에 종속되지만, 떠난 사람은 그것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성을 재검토하는 위치에 선다. 이탈은 대안적 질서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를 멈춤으로써 다시 설계하는 자기 존중의 힘이 된다.
말이 반복적으로 무시되고 경계 설정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침묵과 이탈이 유일한 자기 보호 수단이 된다. 다음의 사례는 이를 더욱 확실히 보여준다.


한 스타트업 팀원이 있다. 그는 본래 역할을 넘어 기획, 운영, 고객 응대까지 팀의 핵심 기능을 실질적으로 책임져 왔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거나 조정된 적은 없었다. 그는 반복해서 “이건 제 역할이 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경고했지만, 팀은 “그래도 너니까 할 수 있지”라는 말로 상황을 회피했다. 경계는 무시되었고, 역할은 고정되었다.
결국 그는 어느 날 별다른 해명 없이 퇴사를 통보했다. 팀은 그의 빈자리를 메꾸려 노력했지만 결국 몇 달 뒤,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회사는 해체되었다. 경고를 무시한 구조의 붕괴였다.
한편 그는 이직 후, 자신의 전문성과 노동 강도가 정당하게 보상받는 조직에서 워라밸을 유지하며 경력을 안정적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는, 떠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존중하는 유일한 선택임을 그는 증명해 보였다.

이 사례는 말이 닿지 않는 구조에서, 침묵과 이탈이 얼마나 정교한 자기 결정의 방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떠난 사람이 패배자가 아니라, 관계와 구조의 외부를 재설계할 수 있는 주체임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결국 자리를 뜨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침식시키는 구조에 반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 침묵과 이탈이야말로 존엄을 지키는 고도의 기술이며 자기 권한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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