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세우는 거절의 언어

by 지여다


조직 안에서 우리는 자주 타인의 기대와 요청 사이에 놓인다. 상사의 부탁, 동료의 제안, 팀 분위기를 고려한 암묵적 참여. 때로는 그 모든 것을 '예'라고 말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말은 곧 나의 자원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나의 시간, 감정, 집중력, 에너지 같은 보이지 않는 자원들이 허락 없이 소모될 때, 우리는 무기력이나 분노 같은 정서적 부채를 안게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거절의 언어'다. 단호하지만 공격적이지 않고, 명확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표현. 그 언어는 단순히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도구다.

문제는 거절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거절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비협조적인 사람이라는 낙인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위가 분명한 상하관계에서는 거절이 위계 자체를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수용은 결국 불만과 침묵, 감정의 누적을 불러오고, 이는 협업의 기반인 신뢰를 무너뜨린다. 거절을 회피하면 오히려 더 큰 단절을 불러온다.


거절은 관계를 끊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감정의 “싫어요”가 아니라, 역할과 책임이라는 자원의 한계를 고려한 구조적 선택이다. 요청은 타인의 필요에서 비롯되지만, 그 필요를 모두 수용해 줄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모든 요청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경계를 흐리게 하고, 결국 관계의 질을 떨어뜨린다. 내가 나를 보호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에 대한 존중도 온전해질 수 있다.

브레네 브라운은 『Dare to Lead』에서 "명확함은 친절이다(Clear is kind. Unclear is unkind)"라고 말했다. 친절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건강한 경계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짜 친절은 나도 지키고, 타인도 존중하는 선 위에서 작동한다. 거절의 언어는 바로 그러한 친절의 구조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훈련된 표현이 필요하다.
“그 부탁은 지금 제 상황에서는 어렵습니다.”
“이 업무는 현재 제 역할과 우선순위에 맞지 않습니다.”
“제 시간을 먼저 조율한 뒤 말씀드릴게요.”
이런 문장들은 단호함과 존중을 함께 담고 있으며,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를 회복하는 말이다.

결국, 거절은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조율의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관계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아니요’라고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이것은 더 이상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조직을 위한 구조적 설계의 핵심이다. 말하지 않으면 침범당하고, 거절하지 않으면 고갈된다. 거절은 회피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법이며, 관계를 존중하는 기술이다.


참고문헌
Brown, B. (2018). Dare to Lead: Brave Work. Tough Conversations. Whole Hearts. Random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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