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은 내 영역, 해석은 타인의 몫

by 지여다



경계를 지킨다는 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묻는다. 그때마다 일일이 말해줄 필요는 없다. 때로는 설명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나를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전략이다.

설명은 친절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내 입장을 방어해야 하는 위치로 밀어 넣는다. 타인의 해석에 미리 대비해 해명하고 정당화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사람의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내 결정은 나의 상황, 나의 기준, 나의 우선순위에 기반해 내려졌는데, 그것을 외부의 기대에 맞춰 설득하려 들면 들수록 내 판단의 고유성은 사라진다.

판단은 내 영역이다. 누군가가 내 선택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건 그들의 몫이다. 내가 아무리 진심을 다해 설명해도, 사람들은 결국 자기 방식대로 이해할 뿐이다. 인간은 타인의 설명보다, 결국 자신의 해석을 더 신뢰한다.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것을 반드시 언어로 설명해야 할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는 내 삶의 주체이고, 내 결정의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나의 판단에는 배경이 있고, 근거가 있으며, 때로는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직관도 있다. 그런 판단을 ‘이해 가능한 언어’로 해체해 보여주는 것은 의무가 아니다.

이 점에서,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자 선언이 된다. ‘말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계 설정이다. 상대방의 기대, 해석, 평가에 반응하지 않고 중심을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침묵은 앞장에서 말한 억압된 침묵과는 다르다. 위계와 눈치 속에서 감정을 억누르는 침묵이 경계를 허무는 수동적 침묵이라면, 여기서의 침묵은 경계를 지키기 위한 능동적 전략이다.

상대방이 내 말 속에서 약점을 찾고, 프레임을 짜서 나를 몰아가려 한다면, 나는 그 구조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왜 그렇게 했냐"는 질문에 반드시 답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침묵하는 것 역시 내 권리다. 설명을 강요받는 구조를 넘어서려면,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신뢰가 먼저 필요하다.

실제로 우리는 대화가 아니라 공격을 위한 질문과 마주할 때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 토론회다. 대선 후보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 질문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하는 순간 되받아치기 위한 공격 시나리오를 이미 짜 놓는다. 질문 자체가 함정인 셈이다. “그건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때 그런 말을 한 이유가 뭡니까?” 이런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해명을 요구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말하는 순간 손해 보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질문이 아니라 덫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토론회에 나선 후보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악의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짜여진 프레임을 무시하고 그 밖으로 걸어 나가도 괜찮다. 말하지 않을 권리, 답하지 않을 자유는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경계다. 이런 구조 앞에서는, 대답 자체를 거절하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실제로, 리더십과 경계 설정이 뚜렷한 인물들은 중요한 순간에 해명이 아닌 선언을 선택한다. 2017년, 영국 대형 서점 체인 워터스톤스(Waterstones)의 CEO 제임스 돈트(James Daunt)는 아마존 킨들 판매를 중단하고 오프라인 매장 강화에 집중한다는 파격적 전략을 발표했다. 당시 전자책 시장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이 결정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일일이 해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책을 발견하게 하는 장소로서의 서점을 회복하고자 한다”는 간결한 설명으로 모든 질문에 선을 그었다. 이후 워터스톤스는 오프라인 중심의 매출 반등을 이루어내며, 이 판단이 결과로 증명되었다. ( The Guardian, 2017.06.24)

이 사례는 침묵과 단호함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설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항상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침묵은 ‘관계를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침묵은 때로 설명보다 더 강력하다. ‘말하지 않는 것’은 회피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이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판단의 주권을 지키는 조용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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