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른 마음으로 각자의 요가를 하고 있겠지만, 내게 요가 선생님은 단순히 동작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구령을 붙여주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요가를 하다 보면 궁금한 점이 많이 생긴다.
"우카타사나가 어정쩡한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있는 게 맞아요?", "나바아사나에서 무게중심을 어디에 둬야 해요? 왜 다리가 쭉 안 펴질까요?", "아르다 밧다 파드모타나아사나에서 자꾸 넘어질 것 같아요.", "다운독에서 뒤꿈치가 바닥에 안 닿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대개는 왜 자세가 빨리 만들어지지 않는 건지 조급한 마음에 생기는 질문들이다.
"다운독을 할 때는 골반과 배를 위로 끌어올린다고 생각하면서 배꼽을 바라봐요. 허벅지 안쪽부터 뒤꿈치까지 타고 가면서 늘려준다고 생각해요. 매일 하는 동작이라도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죠. 요가는 성취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조급함이 묻어나는 질문에는 궁금했던 내용에 대한 대답과 함께 뭔가 철학적인 내용이 함께 돌아온다. 그러면 궁금증이 해소된 듯 만 듯 오히려 더 헷갈리기도 한다.
그렇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 상태로 요가를 꾸준히 하다 보면 조급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뒤꿈치가 바닥에 닿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요가는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사제지간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요가는 구전되어 왔고, 스승을 통해 직접 배운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예로부터 요가에서의 스승은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요가 수련과 전반적인 삶에서의 길잡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 요가에 대해 물어보고 도움을 구할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요가 구루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그들이 했던 말과 경전은 와닿지도 않는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요가를 선보이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듯한 사람들도 종종 보이지만 그들은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요가를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요가에서는 책과 유튜브 영상 또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쉬탕가 요가의 창시자인 파타비 조이스(Pattabhi Jois, 1915~2009)의 제자이자 아쉬탕가 요가를 전 세계에 알린 존 스콧(John Scott)은 '요가는 1%의 이론과 99%의 연습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문장을 읽고 진심이 담긴 영상을 보더라도 요가는 결국 체감이 돼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길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실제 수련과 깨달음은 수련자의 몫. 내가 스스로 깨달아가는 과정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내 옆에 있는 선생님'이다. 나와 소통하면서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계속 봐왔던 사람, 내가 어떻게 요가를 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뿐인 것이다.
선생님은 어떤 수련을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수업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님의 수련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단순한 요가선생님을 넘어 인생스승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나의 요가-어머니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세계인들에게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인 것처럼, 나에게 요가의 어머니는 선생님인 것이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이 내 앞에 있고, 나를 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요가원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요가 수행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신뢰해야 하며, 스승 없이 수행하는 자는 길을 잃는다." (Hatha Yoga Pradipika 1.12)
"스승이 없는 지식은 방향 없는 배와 같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면, 바다를 건널 수 있다." (Yoga Vasistha 5.18)
요가의 사제 관계는 정신과의 의사-환자 관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요가 선생님과 정신과 의사는 방향을 제시하며 내면의 성장을 돕지만, 결국 진정한 변화는 제자와 환자가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과정에서 요가 선생님은 각자에게 맞는 자세를 조절해주고 정신과 의사는 각 환자에게 맞는 치료법을 선택한다. 요가에서 스승을 저울질하는 등 스승을 신뢰하지 못하면 수련과정이 흔들리고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 수 없듯이, 정신과 진료에서도 의사와 환자 사이에 신뢰를 바탕으로 긴 여정을 함께한다.
정신과에서는 '전이(transference)'와 '역전이(counter transference)'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우리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감정을 반복하곤 한다. 전이란 환자가 과거 중요한 인물에 대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치료자에게서 다시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넓은 의미로는 치료자에 대한 환자의 총체적인 감정 반응이라고 보기도 한다. 중요한 사람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이미지로 잘 저장해 뒀다가 의사를 만날 때면 빔 프로젝터로 의사에게 그 이미지를 비추어 보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어릴 때 부모님에게 그러길 원했던 것처럼 의지하기도 한다. 나이가 많은 환자는 젊은 의사에게 딸이나 아들에게 하듯이 과로하지 말라며 걱정해주고 간식을 쥐여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어릴 적 형제에게 느꼈던 경쟁심을 비추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적인 것들을 경쟁과 시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치료자보다 먼저 도착하려는 자신만의 시합을 하거나, 의사가 하려는 말을 예상해서 선수치려 하기도 한다. 전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전이는 오히려 정신분석에서 환자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환자가 치료자를 자신의 과거 속 한 인물로 경험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듯이,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치료자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환자에 대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 이 감정은 치료자에게서 기인하기도 하고, 환자의 전이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이것을 역전이라고 하는데, 역전이는 환자가 타인에게서 무엇을 유발하게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전이와 역전이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복잡하게 얽힌다. 이러한 관계의 패턴은 치료환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어떤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지에 대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은 치료관계가 아닌 일상에서도 쉽게 일어난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일상에서도 과거 감정을 현재 관계로 가져와 비추어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한다. 사실 선생님을 보면서 요가-어머니라고 느꼈던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 전이의 관점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를 치료자에게 비추어 보고 어머니에게 느꼈던 감정을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다시 느끼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이렇게 길게 설명했지만, 어쨌든 '그만큼 어머니도 요가도 내게 중요한 존재구나'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내 결론이다. 요가가 나에게 중요해졌기 때문에, 내가 걷고 있는 요가 수련의 길을 안내해주는 선생님에게서 내 나이대의 인생을 먼저 살아보고 세상의 풍파로부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주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