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머리에 쌍가마를 갖고 있던 나는, 어르신들이 으레 '가마가 두 개네? 이 녀석 나중에 결혼 두 번 하겠어~'라는 너스레를 떠는 걸 보아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체코슬로바키아어과에 입학하기로 결정했고, 졸업 후 체코에 취업하기로 결정한 순간에도 나는, 어르신들이 부모님께 '이러다 아들이 눈 파란 며느리 데리고 오는 거 아니여?'라고 웃으시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부모님은 그럴 때마다 웃어넘기셨다. 아마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셔서 그랬을 수도, 아니면 그러면 어떠냐는 마음에서 그러셨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냥 들으면서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설마 진짜 결혼을 두 번 하겠어?' 생각이 컸으니까.
결과적으로, 둘 다 맞는 말이 됐다. 나는 눈 파란 아내를 데려와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 결혼해 결혼기념일을 2개 갖게 되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해야 하나, 운명적이라 해야 하나? 참으로 삶이란, 때로 그야말로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때도 있는 법이다.
국제결혼을 했다고 말할 때마다, 아내의 사진을 보며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건 역시 어떻게 내가 아내를 만날 수 있었느냐는 일이다. 내가 체코에서 일했던 걸 아는 사람들은 혹시 체코에서 일할 때 만난 게 아니냐고 추측하지만, 우리는 쉽게 말해 옛날 영화 접속처럼, 인터넷 펜팔로 먼저 알게 된 사이다.
2016년 말은 Kpop을 위시한 한국 문화가 서브컬처에서 이름을 높이고 있던 때였고, 당시 스마트폰에서 유행하던 외국인 펜팔 어플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내가 아내의 프로필을 처음 보자마자 사진에 반해 말을 걸었고, 어플이 보통 그렇듯 대화하기에 너무 불편해 우리는 카톡으로 자리를 옮겨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은 운명적이기도 했던 것이, 내가 대화를 걸었던 그날은 마침 아내의 생일이었다.
반년 정도 서로 대화를 이어가던 나는, 아내가 혹시 로맨스 스캠 같은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물론 그러기엔 우리는 서로 사진을 실시간으로 주고받기도 했지만, 아내는 어쩐지 영상통화나 보이스톡은 피했고 텍스트만 주고받다 보니 나로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을 노릇이기도 했다.
의심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여름휴가에 아내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고 우크라이나행 표를 끊었다. 한국에서 우크라이나까지는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경유하는 표를 끊어야 했지만,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복잡함, 가격 같은 건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지금의 아내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 날, 긴 비행을 마쳐 입국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한국인은 우크라이나에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었지만, 공항 입국심사원은 내 여권을 보고 내가 서울에서 왔는지, 평양에서 왔는지를 궁금해하는 어처구니없음을 보여주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갈 동안 한 시간 넘게 불필요한 검문을 당해야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공항을 빠져나와 출구를 나가니, 지금의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고, 나는 이 모든 과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고 결혼을 확신했다. 물론, 실제 청혼하고 결혼하는 과정은 그보다 좀 더 험난했지만, 당시에는 아내가 거짓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존하는 진짜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나니, 쌓아 왔던 폭발한 마음을 거둘 길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아내를 만난 일화를 듣고 나면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 같다며 눈을 반짝이곤 한다. 실제로 이웃집 찰스나, 고부열전 출연 제안도 이따금씩 받곤 했고, 네이버 썸랩에서는 국제커플 인터뷰의 일환으로 나와 아내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기도 했었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면 역시, 언제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확신했냐는 질문일 것이다.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항상 이야기한다. 수많은 여자가 삶에서 스쳐 지나갈 수 있고, 아마도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내 삶에 다가올지도 모르고, 아내보다 더 현명한 여자가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여자는 지금의 아내 하나뿐일 거라고.
우리는 서로가 처음 대화의 물꼬를 텄을 때부터 가십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고, 주제가 항상 형이상학적이었다.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나중에 아이가 생겼을 때의 훈육관이라거나, 우크라이나와 한국 정치의 차이점이랄지. 지금 생각해 봐도 연인 간의 대화 주제로는 그다지 걸맞지 않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나나 아내나 둘 다 공통적으로,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생각이 많다는 점과 그를 풀어낼 장소가 없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채워주는 바구니와 같았다. 아마, 아내 또한 나와 같은 마음에서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한다.
항상 먼 타국에 나를 바라보고 타지 생활을 하며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는 아내를 바라보면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앞선다. 언젠가, 지금의 부족한 글솜씨를 잘 다듬어 나와 아내가 만난 시간을 아름답게 엮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가끔 이렇게 기억을 헤집어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