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 처음이어서 견딜 수 있었던 상실들 >
- 들어가며
주변에서 정말 많이 추천받았던 책. 하지만 메이저 책은 읽지 않겠다는 이상한 고집과 아집을 지키느라 미뤄왔다. 우울해보이는 이 책을 당시엔 썩 읽고싶지 않아 관심이 안 간 것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빌 에반스를 매우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감이 생겼고, 바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내가 항상 그러하듯이, 독서를 게을리 하며, 도서관 대출 기간이 넘어가기 전까지만 읽겠거니-했다. 그러나 괌 여행을 갈 때 글손실을 대비해 사진찍어놨던 책의 몇 페이지를 공항가는 길에 다 읽어버렸고, 결국 공항 도서관에서 이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카드값의 의리로 꾹 참고 이 책을 다 읽었다.
- 스포주의
소년이 죽은 친구를 위해 마련했던 몇개의 방 안, 흰 천으로 덮힌 가구 옆에 앉아 우는 장면이 선하게 그려졌다. 이 책은 사람을 왜이리 쉽게 죽일까. 사람은 왜이리 쉽게 죽을까-잠깐 작가를 탓했다.
나는 슬프거나 답답하면 주로 헛웃음이 나오는데, 한참을 웃었다. 울고 싶은건지 웃고 싶은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문장따위는 눈에 안 들어오는 상태로, 무너지는 상실감을 견디며 몇번을 더 펼쳤다 덮었다를 하고 나서야, 다시 읽을 수 있었다.
- 경험
나는 여느 사람처럼 사랑하고 상처받으며 살고 있지만, 그 사랑과 상처의 존재를 무시했을 때가 있었다. 나오코처럼 시도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매일 아침 자기혐오로 온몸을 그득 채우고 하루를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울보가 된 게 무지 쪽팔리긴 했으나, 독서실이었으므로 누가 무엇을 하는지 크게 노출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 덕에 마음껏 울 수 있었다.
- 나가며
사실 이 책을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결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다만 죄책감에 칭칭 감겨 괴로워하던 내가 생각나 손이 조금 떨렸다. 다 읽고 나서 살짝 두통이 있었던 것을 보면 책이 주는 충격만큼은 나름 잘 흡수한 듯 하다. 아닌가, 점심을 안 먹어서 그런가?
오랜만에 옛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애잔해라, 여려서 부서질듯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참고하여 윗 문단을 작성하였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읽었다면, 더 열렬히 좋아할 수 있었을까. 첫 세 페이지를 읽고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해버린 게 참 아쉽다.
그립던 고등학교 도서관의 푹신한 1인쇼파를 드디어 대학교에서 찾았고, 오랜만에 익숙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비록 신국판(보다 큰) 크기에 450쪽이라 첫인상이 썩 좋진 않았다만, 시인이 번역한 문체가 참 인상깊다.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버티고 계신 분들께 진심으로 추천한다.
-책갈피
p.08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p.160
나이가 들면 말이지, 그다지 많이 먹지 않아도 괜찮게 몸이 달라지거든.
p.162
그런 웅성거림에 진저리를 쳤지만, 그래도 이 기묘한 정적 속에서 생선을 먹고 있으려니까 좀처럼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았다. 그 식당의 분위기는, 특수한 기계 공구의 견본 전시장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한정된 분야에 대해 강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한정된 장소에 모여, 자기들밖에는 모르는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p.162
단지 반년 전의 일이었는데도 그것이 이미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그 일에 대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각했던 탓일 게다. 너무 많이 생각한 탓에 시간감각이 늘어나 헝클어져버린 것이었다.
p.172
남들과 같이 하는 게임 같은 건 옛날부터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건 뭘 해도 제대로 열중할 수가 없어요.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라는 기분이 들곤 하죠.
p.215
그러니 자기가 먼저 앞서 갈 수 있다면 혼자서 먼저 가주었으면 해. 날 기다리지 말고 다른 여자와 자고 싶으면 자고, 나를 생각해서 주저하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 ... 누구의 인생도 방해하고 싶지 않아. ... 나와 관계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는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거야.
p.216
"너는 너무 겁을 먹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어둠이라든가, 고통스러운 꿈, 죽은 사람의 힘 따위에 말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잊는 것이고, 잊게 되면 너는 거뜬하게 회복될 거야."
p.260
아무튼 이 대학에 다니는 것들은 거의 모두가 사기꾼들이야. 모두들 자신이 뭘 모른다는 걸 남들이 알아챌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며 지내고 있다고. 그래서 모두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말을 지껄이며, 존 콜트레인을 듣거나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한 척하는 거지. 그런 게 혁명이야?
p.261
혁명이라는 게 뭐야? 기껏해야 관청 이름이 바뀔 뿐이잖아.
p.381
그러니 와타나베는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 내가 경험해봐서 하는 말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 밖에 없고,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