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시간에 늦지 않게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 단원들의 얼굴에는 놀람과 실망의 흔적이 역력했다. 아주 잠깐 이었지만 모두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을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는 초대받아 온 자들이 아닌가. 모두 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얼굴의 표정을 바꾸고 웃음 띤 얼굴로 교회의 앞자리 좌석에 두줄로 나누어 앉았다.
우리가 놀란 이유는 교회의 규모에 비해 신도의 수가 너무나 적어서였다. 한 서른 명도 채 안되었 던 것 같다. 더구나 그 교회의 신도들의 대부분이 연로하신 노인분들이었던 것이다. 청년들은 한 두 명 아니, 단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근교의 놀위치나 런던 같은 큰 도시로 공부를 하러 떠났거나 직장을 찾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은 40대 초반의 젊은 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두 가지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주일예배와 교회에 행사 같은 것이 있을 때는 이 교회에 와서 목사로서 설교를 하고,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다른 날에는 아마 우체국 같은 곳에서 일을 하신다 했다. 전회에 언급했던 웨일즈의 하노버 교회보다는 이 교회의 형편이 좀 낫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도 이 교회에는 정규직 목사님은 아니지만 목사님이라도 계시지만 하노버 교회에는 그나마 시간제 목사를 고용할 수 있는 형편도 되지 않아 성도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한다 하지 않았나.
목사님이 설교하기 전에 우리가 준비해 간 노래를 불렀는지 그 후에 노래를 했는지 그건 하도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놀라웠던 일은 우리가 찬송가 몇 곡과 성가를 불렀는데 몇 분이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훔치고 계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노래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그들은 교회 재정이 어려워 목사님에게 제대로 월급을 드릴 수도 없는 교회에 우리가 와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가를 불러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며 우리 프레이즈 팀의 노래에 대해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해 주셨다. 그때 반주자를 포함한 우리 단원들은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 우리가 이 교회에 들어섰을 때 많은 청중을 기대하고 왔는데 그게 아니라서 실망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일을 하던 작은 일을 하던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은 그렇게 우리의 노래를 듣고 눈물까지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시는 노인분 들을 보고 오히려 우리가 더 큰 은혜를 받은 날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작은 마을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나도 어느새 우체국, 식료품 가게 그리고 잡화점, 심지어는 봄이 되어야만 볼 수 있는 온실에서 예쁘게 키워낸 네 가지 색의 프림로즈까지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는 이 마을 가게의 단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주로 구입했던 것들은 식료품 종류였고 가끔 작고 예쁜 엽서도 사서 모았다. 여기에서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유별났던 꽃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었나 보다. 결국에는 그중 몇 개의 화분들이 선교센터에 있는 내 방의 창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먹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 선교 센터에도 식당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숙소로부터 선교센터의 식당으로 가려면 한 5분 정도 걸어가야 만 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와 비슷한 음이 들리면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선교센터 식당의 주방장은 음식 솜씨가 아주 좋은 훌륭한 요리사였다. 매끼 부족함이 없는 메뉴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 준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 사람 좋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내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음식을 잘 만들었어도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우리는 매콤 칼칼한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라면 평소에는 김치가 없어도 밥을 잘 먹었던 나였을 텐데 그곳 선교센터에서는 왜 자꾸 김치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특히 긴 잎사귀에 붉은 고춧가루로 물들인 신 배추김치가 눈앞에 어른 거렸다. 그런데 런던도 아니고 그곳에서 그런 김치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나는 한 아이디어를 짜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양배추를 한입 크기로 손으로 뜯어서 과도로 양파를 썰어 넣고 소금과 식초 그리고 설탕을 적당히 섞어 새콤 달콤하게 만들어 먹는 방법이었다. 이 양배추 절임은 우리의 입맛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김치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입맛을 조금은 달래 줄 수 있었다. 또 하나 우리에게 크게 위로가 되었던 음식은 신라면이었는데, 전기 티 포트로 끓인 물을 신라면 하나를 뜯어서 수프 두 개를 넣은 다음에 그대로 라면 봉지에 붓고 잘 밀봉한 다음에 어림잡아 3분 정도 후에 라면 봉지 째로 먹는 것이다. 남자 단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나도 그대로 따라 해 본 것이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못 쓰는 철모에다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말은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비닐봉지에다 뜨거운 물을 부어서 라면을 먹는 방법은 그때 내가 생전 처음 시도해 본 방식이었다. 플라스틱 백과 뜨거운 물의 조합, 그리고 라면, 평소의 나라면 그 유독성에 대해 논하면서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았을 음식이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없어서 못 먹었다. 라면은 너무 먹고 싶었고 그곳에서는 냄비 같은 주방도구를 구할 수가 없었기에 그야말로 궁여지책이었다.
비싼 돈 내고 먹는 선교 센터 식당 음식 보다 이 건강에 유해한 라면이 더 맛이 있었다니 말 다했다. 이렇게 비위생적으로 만든 라면에다 마늘도 파도 들어가지 않은 양배추 절임을 맛있다고 먹었으니 역시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로 우리는 Norfolk Ashill에 있는 St. Nicholas' Church라는 곳에서 공연을 하였고 그곳의 성도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이 교회는 규모도 컸고 성도들도 많았으며 그날 공연에서 네 명의 여자단원들은 한복을 입었었다. 내 한복의 색이 좀 화려했던지 공주님이 입는 옷이냐는 말을 들었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한복은 크리스마스에 입으려고 준비해 간 파티복이었던 셈이었다. 성도들은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했고 파티의 분위기는 흥겹게 익어갔다.
그런데 그때 그 교회의 목사님이 등장하셨다. 이분도 40대 초반의 젊은 분이셨다. 그런데 목사님의 등장에도 가까이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걸뿐 아무도 목사님을 특별히 대우를 하지 않았다. 앉을자리가 부족했던지라 목사님이 앉을자리가 없었는데도 그 누구도 목사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다. 목사님도 성도들의 그런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한창 흥이 오른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면서 우리에게 와서 인사도 건네고 여러 대화가 오고 갔다. 나는 거기에서 성도들이 목사님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별개의 존재로 구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 것이 사실이다. 우리 한국 같았으면 목사님이 서 계시게 성도들이 그냥 두지 않는다. 그리고 목사님들은 목사님들 대로 성도들이 자기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 그런 방식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역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교회는 좀 다르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그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우리 한국 교회의 목회자님들도 많이 달라진 것으로 안다. 목사 자신의 권위보다도 성도들에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목사님들이 이제는 많아졌다는 얘기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영국 교회에서 더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후로도 나는 영국에 한두 달씩 머물면서 일부러 여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 보았다. 나름 교회마다의 특징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통적인 느낌은 다른 어떤 장소에서 보다 교회에 갔을 때가 내 마음이 더 편했다는 것이다. 영국 교회가 더 이상의 쇠퇴를 멈추고 앞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국 교회에 대한 글을 여기에서 끝내려고 한다.
단 2회의 제한된 분량으로 영국 교회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였고 자칫 수박 겉핥기 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영국교회에서의 저의 경험들을 모아서 써나간 이글들은 교회에서의 다른 많은 경험들에서 선택하여 요약한 것들입니다. 이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해진의 영국 생활기 다음 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