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7: 50 (금) 202x-12-xx 』
사무실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는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하게 시간을 알려줄 뿐이었지만,
10분 뒤면 주말이 시작된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사무실 공기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달리, 투잡 병아리가 된 김과장은 그렇지 못했다.
운명 같은 타이밍이니, 내가 나를 살렸다느니
온갖 설레발을 치며 새롭게 시작될 일상에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막상 2시간 10분 뒤 진짜로 시작될 알바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꽤나 복잡해졌다.
'일 끝나고 또 일하는 건데 버틸 수 있을까?'
'해보고 못 버티겠으면 그만두면 되지. 돈을 안 버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기왕 시작한 거 요식업 배워볼 나름 좋은 기회인데 그렇게 쉽게 그만둬?
버텨서 다른 일도 해봐야지. 결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마음이 약해져?'
한밤중의 급발진으로 시작된 당찬 투잡.
하지만 입사 이래 ‘퇴근 이후 노동’이라는 개념은 내 사전에 없었고,
고된 정신노동이 끝난 후 또 다른 육체노동을
과연 내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
쏟아지는 업무와 처음 겪는 상사, 동료와의 갈등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신입 시절을 지나
대리를 달고 난 후 세운 딱 한 가지 철칙이 있다.
‘퇴근 후, 일 생각 금지'
그런데 박부장을 만나면서 그 철칙은 서서히 무너졌다.
어느새 박부장이 해야 할 일까지 떠안고 처리하게 되었고,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머릿속에선 일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상 번아웃 상태.
하지만 멘탈 회복하겠다고 이렇게까지 힘들게 번 돈을 퇴사하고 해외여행 몇 번으로 날려버리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
그리고 도망가 봤자, 결국 1인 가정의 가장인 김과장은 다시 일터로 돌아와야 한다.
(참고로 김과장은 내년 진급 대상이다.
고월급 저연비 월급루팡 한 명 때문에 진급 기회를 버린다? 절대 용납 못 하지)
어차피 있어야 할 지옥이라면
숨 쉴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놔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작은 알바가 나에게 신선한 바람이 되어줄것이다.
그렇게 퇴근길 지옥철을 뚫고 가게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금토마감하기로 한 김과장입니다.'
'아,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친구죠? 반가워요.'
연말이라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거리는 전구가 반겨주는 가게 문을 열고
카운터로 들어서자, 면접 때 만났던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카운터 밑 선반에서 앞치마를 꺼내 입었다.
(요즘 앞치마는 예쁘긴 한데 뭐가 이리 복잡한지, 입는 데만 5분은 걸렸다.)
옷매무새를 다지고 지난번 대충 훑어봤던 가게 내부와 주방을 눈으로 찬찬히 둘러봤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빈티지 의자들과 조명, 그림들이
아늑하면서도 힙한 감성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멀뚱멀뚱 가게 구경이나 하며 어색하게 카운터 한켠에 서 있던 김과장을 본 사장님은
서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주방으로 불러내 신참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가게 예쁘죠? 그림 저희가 직접 그린 거예요ㅋㅋ
오늘은 처음이니까 메뉴판부터 숙지하시고, 손님 오면 주문받는 것부터 시작해요.
지금 12월이라 많이 바빠서, 설거지 쌓이면 중간중간 바로 처리해 주시고요.
직장 다닌 지 좀 되셨다니까 손님 응대는 따로 안 알려드려도 되겠죠?
궁금한 건 언제든지 물어보시고, 잘 부탁드려요~"
한 직장만 몇 년을 다닌 고이다 못해 썩은 고인물로서 이런 멘트를 직접 듣다니.
신입 취급해주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오늘의 두번째 노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 손님 응대? 내가 짬바가 있지. 사람대하는 건 익숙하다 못해 질립니다~'
나름 운동선수들의 위너마인드를 따라하며
스스로 마인드컨트롤을 하던 김과장이었지만,
그 상태가 오래가진 않았다.
-쨍그랑, 쾅! 쨍그랑
"어우, 과장씨 보기보다 힘이 센 편이네. 안다쳤죠? 조심해요~"
"하하; 주의하겠습니다"
벌써 2개째.
손님이 많아 바쁘고 긴장한 상태에서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제자리로 옮기는 사이에
순간 부주의로 시원하게 깨먹은 와인잔 갯수다.
아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잇다른 재물손괴로 인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지만,
연말 대목이라 그런지 사장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다행히 유쾌하게 웃으면서 넘어가주신 덕에
깨먹은 와인잔 유리를(사실은 산산조각 난 내 멘탈을)
조용히 빗자루로 쓸어담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이거 진짜 인턴이잖아? 새롭네'
이래서 사람은 계속 새로운 일에 도전해봐야 하나.
원래 직장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마주한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 뒤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신없이 일하다 마감 청소까지 끝내고 나니
어느새 오전 12시, 퇴근 시간이다.
"과장씨 오늘 수고했어요~ 보니까 긴장한 것 같던데, 곧 적응하실 거예요.
내일도 시간 맞춰서 잘 와주시구요~"
오랜만에 와인잔 격파하는 차력쇼도 보고
힘센 알바생이 들어왔다고 신나게 웃으며 신입을 조롱하는 사장님.
'아, 이거 좀 가겠구나'는 촉과 함께
조용히 외투를 챙겨입는 김과장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않았다.
비록 와인잔 두 개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 파편들 사이로 회사 때문에 금이 간 일상을
다시금 이을 작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