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한낱 매너였을 뿐인데

by 김과장

『네, 그럼 그날 8시에 가게에서 뵐게요.』

몇 번의 문자 끝에 이틀 뒤 저녁 8시, 집 앞 식당에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연락을 끝낸 김과장은 마음 한편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아무런 부담 없이 면접을 보러 간다고?'


이젠 거래처와의 까다로운 대화도 나름 능숙하게 해내는 김과장이지만

면접 때만큼은 긴장 때문에 튀어나오는 염소 목소리를 막기 위해 청심환을 챙기곤 했다.

(속세에 찌든 직장인의 흐리디 흐린 눈깔을 졸업반 취준생의 반짝이는 눈망울로 갈아 끼우고 '알잘딱깔센'이 가능한 인재임을 어필하는 건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다)


특히 채용 시장에 역대급 한파가 들이닥친 요즘,

예전엔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작은 회사의 공고에도

오갈 데 없는 경력직 수십 명이 몰리는 사태가 일어나기 부지기수였던지라

계속되는 탈락과 연봉협상 결렬 등을 거치며 심적으로 많이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누구에게 날 증명하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회사 탈출용 부캐를 만들고자 가는 면접이었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면접도 아주 깔끔했다.

몇 살인지, 서빙이나 매장 관리 경험이 있는지,

직장인인데 근무가 가능한지 정도만 간단하게 묻더니

집이 가게랑 가까운 점과 관련 자격증 보유를 좋게 봐주셨는지

며칠 뒤 출근하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

며칠 뒤 사장님에게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김과장님,

정말 죄송하지만 내부적으로 이견이 생겨

채용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나, 어쩌면 굿이라도 해야 할 지도?

이직이며 알바며 면접 때마다 매번 이게 무슨 일일까.

이직 면접에서 떨어졌던 일에 비하면 아픔의 정도는 거의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나름 기대했었는데.

또 나만 진심인거지.


아쉬운 마음을 들이키며 마지막 예의를 지키고자

매너상 문자 한 통을 남겼다.


『아닙니다. 내부사정 때문에 그러신 건데요.

다음에 좋은 기회 있을 때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쉽지만 어쩌리.

나랑 인연이 아닌 것을.


그렇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당근을 다시 켰다.

이윽고 찾아낸 알바는 지하철로 5 정거장 떨어진 작은 선술집.

하이볼이나 원믹스 칵테일과 함께 간단한 일본식 요리를 파는 곳이었다.

소개 페이지엔 'N잡러는 안 받음'이라 적혀 있었지만

'못 먹어도 GO'라는 마음으로 일단 지원했는데, 이게 웬걸?

다음 날 바로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당일 퇴근하고 바로 도착한 업장에선

오래간만에 새로운 방식으로 내 전두엽을 자극하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남자친구 있으세요?”

“자취하세요? 아님 부모님이랑 같이 사세요?”

"헤어진지 얼마나 됐어요?"


점장이라는 사람은 일 얘기는 '다 하면 된다'며 대충 넘기더니

갑자기 내 사생활을 캐묻기 시작했고,

이윽고 메모장을 꺼내더니 그걸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xx살, 남자친구 없음, 00역 인근 거주...


점장의 볼펜이 움직일수록 온몸에 싸한 기운이 훅훅 밀려왔지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애써 눌러 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걸 따로 적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런 걸 역으로 물어보는 사람이 처음이었는지

점장은 급격히 당황하며 횡설수설했고,

급기야 주류 영업도 맡아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아, 직전에 같이 일한 여자직원은 남자친구가 씩씩대면서

가게를 찾아와 어이없었다는 말도 곁들였더랬다.

대체 그 얘길 나한테 왜 하는데...?)


의도가 불분명한, 하지만 겁나 험한 것이 올 것만 같은 질문릴레이에 이어

최저시급 받는 보조알바에게 영업까지 시키겠다는 마인드에

내 머릿속 ‘진돗개 1호’가 발령되던 그 순간,


애석하게도 그는 그 자리에서 즉시

나를 채용하겠노라고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본능은 계속 ‘돔황챠’를 외치고 있었지만,

면접까지 본 마당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 할 것 같았다.

결국 찰나의 고민 끝에, 김과장은 다음 주 출근을 약속하고 가게를 나섰다.

이제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또래로 보이는 점장은 사회경험이 부족한지 어딘가 어설퍼서

'여차하면 내가 대응할수 있겠지'하는 오만함이 섞인 안일한 판단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날따라 진눈깨비가 내려 안 그래도 축축하고 우울한 날씨였는데

마음속 한 켠 찝찝함도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알바를 알아봐도 마땅한 데가 없어

일단 일주일만 나가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어느 날,

퇴근길 버스 안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집 앞 식당 사장님이었다.

내부 조율이 끝나 다시 알바를 뽑기로 했는데,

혹시 출근 가능하냐는 연락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타이밍에 이런 전화가?


점장님에겐 살짝 미안했지만 누굴 걱정해 줄 여유가 없다.

이번엔, 나부터 살아야 했다.


이번주부터 바로 출근하겠다고 확정 짓고 기분 좋게 통화를 끊은 다음

선술집 점장님에게 사정이 생겨 출근을 못할 것 같다고 죄송하다는 문자를 바로 때렸다.

(그분에게 나는 하루아침에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서울에 없는 사람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장님이 채용을 취소한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

답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고맙다는 답장이 도착해서

좋은 인상이 남았고, 그래서 다시 연락을 주셨다고 했다.


과거의 나가 오늘의 나를 구한 거구나.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살다 보면 매너와 정도를 지키는 게

괜히 나만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종일 인터넷서핑만 하는 박 부장에게 상사라는 이유로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한지 벌써 두 계절이 지났다.)


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는 그런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고난뿐인 인생에 가끔씩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돌려받는 날도 있나 보다.


그냥 예의상 보낸 문자 한 통이었다.

근데 그 매너 하나가,

박부장 묻은 나의 인생을 투잡으로 씻어낼 기회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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