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씨앗이 자라면 내 마음도 자랍니다

by 헤아림


"밭에 무슨 채소 키워요?"


내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내가 함께하기 전에도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계신다고 하면 가장 흔히 묻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키우는 작물들을 줄줄 나열했다. 토마토, 오이, 가지, 고구마 등 보통의 사람들이 텃밭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생각하는 기본적인 작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하나하나 다 나열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그냥 마트에서 사 먹는 채소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가끔 나도 밭을 둘러보면 언제 우리 농사가 이렇게 커졌나 싶어 놀랍다. 계속 이야기해 왔듯이 처음부터 이렇게 큰 규모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수도 시설이 있어 수도꼭지만 틀면 물을 줄 수 있지만 말라가는 고구마에 줄 물을 댈 곳이 없어 집에서부터 실어 오던 때도 있었다. 말라버린 샘물에서 조금이라도 더 떠다 주려고 물통을 이고 지고 나르다 몸살이 났던 기억도 있는데 언제 이렇게 커다란 농장이 되었을까. 매년 조금씩 더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올해는 김장 채소도 심어볼까?' 해서 무와 배추를 심기 시작했고, '올해는 고춧가루도 만들어 볼까?' 해서 고추를 심기 시작했다. 부모님께는 낯설었던 아스파라거스나 바질, 루꼴라 같은 서양 채소는 내가 계속 오래 먹고 싶다 해서 심었다. 수확한 아스파라거스로 명란 아스파라거스 파스타를 만들고, 바질로 페스토를 만들고, 루꼴라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렇게 이름부터 낯선 작물이 아니라 익숙한 작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그동안 소개했던 냉이 김밥, 완두 콩국수, 토마토 포카치아, 배추 파스타와 같은 건 그동안 엄마가 해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으로 요리한 음식들이었다. 두 분은 낯선 재료와 음식을 만나도 싫은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네가 해주니 이렇게 새로운 음식도 먹어 본다며 맛있게 먹어주셨다. 그 덕에 계속 새로운 요리법을 찾고 시도했다.


<리틀 포레스트>가 빵 먹고 싶으면 밀부터 심는 이야기 아니냐며 농담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빵 만드는 것에 재미를 붙이면서 밀을 키워볼까도 했지만 키우는 것보다 수확 후 제분을 맡기는 게 더 어렵다는 말에 포기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도시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나는 나의 모든 게 멈춰버린 순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 코모리—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시골 마을—를 찾았다. 곧바로 세상에 뛰어드는 게 두려웠다. 매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실려 다니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집에 오면 쓰러지듯 잠이 드는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대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밭이 있었다. 오늘은 어쩐지 몸이 무거워서 가기 싫다 하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왔다가도 밭을 둘러싸고 있는 갈참나무 사이를 통과한 시원하고 상쾌한 산바람이 코 속으로 들어오면 금방 호미를 들 힘이 생겼다. 서늘한 공기에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 서로에게 짜증 내며 일을 미루다 가도 금방 딴 민트 잎에 꿀을 타서 만든 따뜻한 민트차 한 잔에 모든 게 녹아내렸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씨앗을 심고 매일같이 물을 주며 들여다보면 어느새 머리를 내미는 작은 새싹들과 함께 내 마음도 자라났다.


"말은 믿을 수 없지만 내 몸이 느낀 거라면 믿을 수 있다."


<리틀 포레스트>의 대사처럼 나 역시 내 몸으로 온전히 사계절을 겪어내며 내 삶에 대한 작은 믿음이 생겼다. 내 입으로 들어와서 내 몸을 만드는 게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계절의 흐름에 맞춰 주어지는 열매를 맛보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분명하게 느끼면서, 내가 만든 음식을 나누며 말로 전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한 발자국 내딛을 용기가 생겼다. 대단한 걸 바라며 살아온 적 없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씨앗만큼 아주 작은 용기였다. 이제 작은 용기의 씨앗을 심는다.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마음을 다해 보살피다 제철이 되면 소중한 열매도 만날 것이다. 내가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온몸으로 겪어냈기에 생겨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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