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끔찍한 집에서 벗어나 샐리의 집으로 옮겨가던 날, 나는 샐리의 옆자리에서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세 도착한 샐리의 집은 그 여자의 집처럼 부자 동네에 위치해 있거나 호화로운 것은 아니지만 소박하면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짐부터 풀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선 내 방은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바로 마주하는 창문을 통해 푸릇푸릇한 앞마당 풍경이 보였고, 퀸 사이즈 침대와 올리브 그린 색 침구세트는 전부 새것이었다. 너른 붙박이장은 내 옷과 캐리어를 모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화장대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까지 하나하나 나를 생각하며 직접 고른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미국에 온 지 약 2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인류애였다. 타국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어른이자 보호자가 나를 돈벌이 혹은 이용수단으로 보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보듬어준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한 줄로 짧게 요약하자면 낯설지 만 아낌을 듬뿍 받는 느낌이랄까.
감탄하며 한참이나 방을 구경하다 문득 정신이 들어 밖으로 나왔을 때 작은 강아지 브리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과 인사할 수 있었다. 우드톤 거실은 아담하고 간소하지만 포근한 느낌이 가득했고, 거실을 가로질러 나가면 작은 서재와 뒷마당이, 거실의 오른쪽에 있는 짧은 복도를 따라가면 작은 영화관을 구현해 둔 가족실이 있었다.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는 저녁을 보낸 다음날 나는 샐리의 친정 식구들까지 전부 소개받게 되면서 나는 샐리를 ‘미국 엄마’라고 부르게 된다.
나를 환영하는 의미로 온 친정식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인사를 시켜주겠다던 샐리는 내 입주를 시기가 부활절과 맞아떨어진 것이 썩 만족스러워 보였다. 파티 준비를 아주 즐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알록달록한 이스터에그를 함께 색칠하고, 마요네즈와 피클을 다져 넣은 삶은 계란 샐러드를 만들었다. 앞마당에 보물 찾기처럼 뭘 잔뜩 숨겨놓은 다음 어린 조카들과 함께 찾기도 하고, 멀리 LA에서 온 동생 내외의 람보르기니를 구경하기도 했다. 초록색 잔디가 깔려있는 마당은 싱그러운 부활절 분위기를 내기에 최적화된 공간처럼 보였다.
그저 새 가족을 만나 이사를 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유리 구두를 발견한 신데렐라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활기가 넘치던 이스터 파티가 끝나고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똑같이 평범한 일상이지만 더 이상 먼 길을 혼자 걷지 않아도 되는, 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점과 나 홀로 식사준비를 하지 않는 점이 달라졌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한 뒤 나에게는 언니인 샐리의 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서브웨이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숙제를 하며 언니의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언니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에 샐리도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때문에 그녀가 퇴근길에 우리를 픽업해서 집에 도착하면 부엌에서는 퇴근한 아빠가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둔 외동딸인 나에게 이러한 풍경은 현실로 실현될 수 없는 희망사항으로 여겨졌었다. 나의 오랜 소원이 눈앞에서 완벽하게 구현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받은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