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미국에 있는 샐리 가족과는 랜선 친구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15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끈끈하게 이어져있고, 여건이 될 때는 선물을 주고받고, 아직도 서로 가장 먼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남긴다. 언니가 첫 조카를 낳았을 당시 내가 돌 도장과 한복을 선물했던 일, 나와 엄마가 아몬드를 먹고 싶어 하자 샐리가 할아버지 농장에서 아몬드 10kg를 가져다 한국 집 주소로 보낸 일도 있다. 그때 우리를 갈라놓으려 무던히도 애썼던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와해되었지만 우리는 거리만 멀어졌을 뿐 여전히 견고하다. 돈과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의 연합이 당장은 강해 보여도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는 것, 사랑의 힘으로 쌓아 올린 정신적 유대감이 훨씬 강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주고받은 대화에서 내가 한국에서도 샐리를 그리워하듯이 샐리도 그곳에서 나를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내가 없는 자리가 허전해 여러 학생을 받아봤지만 결국은 나를 대신할 수 없어 더 이상 학생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샐리에게 다른 학생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나의 미국인 엄마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기에 진심으로 타지에 홀로 나온 어린 학생들을 아껴주고 보살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이기에 아직 만나지 못한 것 일 뿐, 그 손길이 필요한 또 다른 내가 어딘가에 있을 것 만 같아서 샐리가 그 일을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고 했다. 샐리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답하지 않았다.
나는 샐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불필요한 언쟁에 침묵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높이고 분란을 조장하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법, 사랑과 포용을 통해 분노를 잠재우고 혐오를 가라앉히는 법,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의지와 인내심, 보호가 필요한 약자를 도와주는 이타심. 아마 혼자였다면 절대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그 시절 나에게 샐리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강력한 방패였고, 엄마이자 선생님이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준 나의 영웅이다. 마냥 어리기만 한 10대 소녀에서 30대로 접어들었음에도 십수 년 전의 일을 정확히 적어낼 정도로 큰 흉터가 남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들을 대수롭지 않게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은 그때 그녀가 내 곁을 지켜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샐리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나의 은인이자 롤모델이며 혐오가 만연하고 분노가 가득한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랑과 포용의 힘을 아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