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하루들이 쌓여 일 년이 지날 즈음에 나라는 고객을 외국인에게 빼앗긴 것이 분했던 첫 번째 한국인 보호자가 샐리에게 문제제기를 하면서 나는 샐리의 집에서 나와 다른 집으로 가게 된다. 사실 서류상 행정절차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는 나로서는 그들이 어떤 조치로 샐리를 압박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내가 아는 것은 샐리는 나를 최대한 데리고 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수시로 걸려오던 전화, 길어지던 실랑이, 원래 재학 중이던 학교에서 첫 번째 보호자 집 근처에 위치한 학교로 전학수속을 밟게 된 일들까지 우리는 갖은 우여곡절을 함께 헤쳐 나가야 했지만 샐리는 나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샐리가 굳건하게 버티니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알려주지도 않은 내 번호로 전화를 해서 본인 집에 주말마다 강제로 식사를 하러 오라고 했다. 한식을 한 끼 제공했다는 명목으로 터무니없는 비용을 청구할 것을 알기에 가지 않았더니 본인의 요구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샐리를 괴롭힐 수밖에 없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 사람의 주제넘은 행동은 우리를 병들게 했고 샐리와 나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멀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사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선택이 아쉽다. 샐리와 함께 힘을 합쳐서 이겨내 볼걸, 그랬다면 더 많은 추억을 안고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건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슬프게도 과거의 나는 프레즈노 한인 하숙집 주인 무리에 넌더리가 난 상태였다. 악에 받친 나머지 샐리의 집에서 나가는 한이 있어도 당신 말은 따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나와 그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샐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는 조건으로 나는 그 사람이 선택한 다른 외국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용당할 생각도, 더 이상 돈줄이 되어줄 의지도 없었기에 그들과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고, 그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새 보호자에게 자기 허락 없이는 라이드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등 다양하게 행패를 일삼는 바람에 기본적인 일상을 누리는 일조차 어려워졌고, 결국 이사 6개월 만에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성년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을 텐데 어린 나이가 발목을 잡은 점이 아쉬웠다. 아주 놀라운 사실은 첫 번째 집주인의 직업이 종교인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종교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각인시켜 준 대표주자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무교라는 종교적 신념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시작도 끝마무리도 유쾌하지 않은 유학생활이었지만 총 4년간의 기간 중 1년 6개월을 샐리 가족과 보낼 수 있어 행복했고, 다사다난한 2년 6개월을 상쇄시킬 만큼 의미 있고 값진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