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업들은 직급 체계를 간소화하고, 호칭을 하나로 통일하는 흐름을 따르고 있다. 삼성, 신세계, 한화 같은 대기업은 전 직급을 ‘프로님’으로 통일했고, 카카오, 네이버, CJ 등은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방식으로 수평적 문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 변화는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문화의 깊은 층을 건드리는 이야기다.
나는 25년 전,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계 기업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때 이미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같은 한국식 직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장부터 신입까지 모두 ‘님’으로 불렸다. 그 회사에서 18년을 일하며 ‘비비안 님’이라는 호칭은 내게 너무나 자연스러운것이었다. 이름을 불러야 대화가 시작되는 문화, 사람을 중심에 둔 문화였다.
이후 이직한 독일계 회사는 여전히 전통적인 직급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시장의 흐름에 맞게, 호칭체계를 간소화 시킨 가장 큰 고객사였던 현대자동차를 벤치마킹하여 "매니저와 책임매니저"로 호칭 간소화를 실행하였다. 그 이후 2년 뒤에는 드.디.어 전 직원의 호칭을 ‘님’으로 통일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수평적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시도였으며, 간소화된 호칭으로 좀 더 민첩하게 일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처음엔 어색했다. 이름을 외워야만 호칭할 수 있었고, 회의에 들어오는 동료의 이름을 모르면 인사조차 어렵다. 특히 부서장이나 임원을 ‘이름+님’으로 부르는 건 많은 이들에게 불편함을 줬다. 어떤 부서는 잘 적응했지만, 보수적인 분위기의 부서는 여전히 ‘팀장님’, ‘부문장님’이라는 옛 호칭을 계속 고수했다.
결국 1년 만에 그렇게 "님과함께"라는 이름의 캠페인으로 시작한 ‘님’ 호칭은 막을 내렸다.
다시 ‘매니저/책임매니저’ 체계로 돌아갔다. 이름을 외우지 않아도 되고, 업무 중심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었지만, 사람을 중심에 두는 문화는 한 발 물러선 셈이었다.
이름을 존중하는 문화에는 사람이 있다. ‘비비안 님’은 이름을 알아야 대화가 된다. 반면 직급을 존중하는 문화에는 이름이 없다. ‘부문장님’은 이름을 몰라도 된다. 그저 역할만 알면 된다.
AI가 업무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산업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여전히 한국은 이름 뒤에 직급을 붙이고, 그 직급을 극 존칭한다. 거기에 더해 높은 호칭으로 불리기 위해 애를 쓴다. 외국 상사에게 한국에만 있는 이 특이한 호칭 체계를 설명할 때마다 얼마나 난감했던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호칭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의 철학이고, 문화의 방향이다. 호칭이 바뀌지 않으면, 한국 기업의 경직된 문화도 바뀌기 어렵다. 직급이 아닌 이름을 존칭 하는 “비비안 님”으로 불리는 조직은 사람을 존중하는 조직이다. 호칭의 단순화는 수평적 문화로 가는 기초 중에 기초이다. 그 기초를 다지고 세우는 것은 그 조직의 철학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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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연재>
일 5:00 AM : 나의 성장일지
월 5:00 AM : 직장인 vs 직업인
수 5:00 AM : 시아버지 작사, 며느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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