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컨의 <너무 늦은 시간>을 읽고~
한때 유명했던 도서중<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바로 떠올랐다. 서로 절대 이해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 서로 다른 별에서 태어난 존재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 조건의 이야기다. 이 책의 세 단편은 남녀의 갈등을 감정이나 윤리의 제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누가 어떤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토대가 어떻게 형성되고 박탈되어 왔는지를 작가는 집요하게 캐묻는다.
첫 번째 단편은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여성의 토대를 드러낸다. 남성은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에게 ‘땅’을 내주지 않는다. 여기서 땅은 재산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자 주체성이다. 여성은 함께 살고 있지만 스스로 서 있지 못한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누군가의 세계 안에 임시로 놓여 있을 뿐, 스스로 발 딛고 설 수 있는 자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유지되는 이 구조는, 여성이 왜 늘 불안정한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단편에서 이 문제는 개인을 넘어 사회적 구조로 확장된다. “가난한 사람이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은 그래서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토대를 이미 확보한 자가, 구조적으로 박탈된 존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단편은 여성이 왜 가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가난이 개인의 태도나 성향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의 결과였음을 드러낸다. 만족을 묻는 질문 자체가 이미 불평등한 위치에서 사용된 폭력임을, 작가는 또렷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게 한다.
세 번째 단편 〈남극〉에서 이 질문은 존재론적으로 완결된다. 여성이 말하는 지옥은 ‘추운 곳’이고, 남성이 말하는 지옥은 ‘황폐한 곳’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에게 지옥은 관계의 온기가 사라진 상태이며, 남성에게 지옥은 의미를 만들어낼 대상이 사라진 상태다. 이 둘은 겹치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사랑, 같은 선택 앞에서도 남녀는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외도를 선택한 여성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행복한 상태에서 ‘가능해 보이는 선택’을 한다. 그 남자의 보살핌은 따뜻하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삶이 지속될 조건과는 다르다. 남극이 대륙이라는 이유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지만, 결국 인간이 정착할 수 없는 땅이듯, 그 관계 역시 안착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는 지옥을 벗어나려 했지만, 지옥의 형태만 바꾸었을 뿐이다.
서문에 등장하는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는 문장은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둘을 동시에 유지해온 구조, 다시 말해 여성에게만 견딤을 요구해온 세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선언에 가깝다. 가능한 선택이지만, 선택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가 버린 상태. 그래서 제목은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비관으로만 읽고 싶지 않다.
이 문장은 끝이 아니라 어떤 바램처럼 읽힌다. 여성에게만 견딤을 요구해온 오래된 옷장을 이제는 바꿀 필요가 있다는 인식의 요구 말이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붙들고 자신을 줄이는 대신, 낡은 것을 덜어내고 새로운 조건을 입어보는 선택. 『너무 늦은 시간』이 말하는 ‘너무 늦음’은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존재를 다시 설계할 수밖에 없게 된 인식의 밀도를 가장 문학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ㅡ이 책을 추천합니다ㅡ
ㅡ관계가 이상한 건지, 내가 예민한 건지 헷갈린 적 있는 사람에게.
ㅡ사랑하고 있지만 어딘가 불균형하다고 느껴본 사람에게.
『너무 늦은 시간』은 그 감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