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것을 못마땅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전공이 디자인인 것을 못마땅해하셨습니다. 막냇동생까지 디자인 전공을 하게 된 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여기셨어요. 동생이 더 행복해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도 나는 내 직업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긍지가 있었어요. 자존감이 강한 사람으로.
우리는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자존감은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이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자존감은 지금처럼 주목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강했고, 개인보다는 조직과 윗사람의 의견이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원주의와 개인 중심의 사회이며 주체가 나로 변경되면서 남의 의견보다는 나의 의견이 중요하게 되었지요. 사회는 불확성이 늘어났고 경쟁은 치열해졌습니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인간관계를 넓히는 동시에 더 단절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자존감을 키우고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변화된 사회구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가지면서 '나'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해 둘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피상적인 관계가 흔한 요즘, 자존감은 자신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하지만 타인과의 비교나 비난, 또 비약은 방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지요.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면서, 예전 부모님에게 배운 자존감의 방식과 현재의 자존감 가치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 혼란은 '나'에 대한 중요도가 세대마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나름 꼴통의 기질을 발휘하며 바쁘고 알차게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모두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학교에만 몰입된 꼴통의 학생이었고 학과 성적 장학금은 물론, 과대, 대의원 등 학생 활동 장학금까지 받아 아버지께 자랑스럽게 증서를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잘했다"는 칭찬 대신 학교 교무과에서 장학금 증서를 받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방식이셨으니 그렇게 했습니다.
아버지 회사에서는 복지로 직원 자녀 등록금이 지원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내가 받은 장학금들을 고스란히 회사에 반환하셨습니다. 아~ 내 꼴통 기질의 근원은 아버지였던 겁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아버지의 결정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오랫동안 불만 섞인 시선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결정은 자존감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지금, 남의 의견보다는 내 의견이 중요한 시대의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에게 아버지의 생각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 스스로가 ‘내가 내 책임을 다하고 싶다’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신 거고,
‘내가 받은 만큼 회사에 갚아야지’라고 생각한 자기 신념과 책임감에 내린 결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떳떳하게 여기는 것이 아버지의 생활 철학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선택이라고도 생각됩니다.
‘회사에서 월급 받는데 학비까지 지원받을 수 없어’,
‘내가 이런 혜택을 받는다고 누군가 곱지 않은 눈으로 보지 않을까’와 같이 자신이 회사에 제공한 공로를 축소하고 당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조차 미안해하는 태도로 과잉된 책임감을 지며
‘회사에 잘 보이기 위해’ 혹은
‘평판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아버지를 옆에서 바라보는 마음이 속상했습니다. 엄마는 더 많이 속상하셨을 겁니다. 황소고집이셨던 아버지께 한마디도 반대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아마도 집안이 소란스러워지기만 했겠지요.
80년대의 아버지에 대해 자존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집단주의적이며 권위주의 시대였고 청년 군인으로 8년을 지내신 분이었으니까요. 개인의 사고판단이 뭐가 중요했겠어요. 아버지는 가장이었는걸요. 그 결정은 아버지가 네 딸을 키우신 당신만의 해석이 들어간 우직한 성실함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회사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역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아버지의 자존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만 바라보는 딸 넷과 부인을 부양해야 했고, 직장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활동지였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딸이 둘 있었고, 앞으로 대학에 들어갈 딸이 둘이나 더 있으니, 직원으로 아버지를 평가할 회사의 반응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회사에서 자신의 상태와 당연한 권리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습니다. 그때만 해도 당신은 다른 방송국에서 스카우트하려는 몇 안 되는 기술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당시 회사의 회계 담당은 반납한 등록금 비용을 어떻게 처리했을지도 궁금합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던 저는 다행히 좋은 성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버지께 장학증서를 내밀었음에도 별다른 반응이나 좋은 일이 없었던 모습을 지켜본 동생들은, 이후 자신의 장학금을 직접 처리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어쩐지 여유롭게 지내더군요.
맏이는 동생들보다 늘 먼저 겪고, 늘 먼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오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출발점 삼아 나 자신과 타인을 이해해 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아버지 특유의 독특한 표현이었기에,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쉽지만은 않습니다.
흔들리는 인생의 시간 속에서 아버지는 집단 가치가 우선시 되었던 시대에 맞는 자존감으로 살아오셨고, 나는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아실현을 중심으로 자존감을 쌓으며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내 아이들은 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며, 유연하게 앞세대보다 더 잘 대처하며 살아가길 바라고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