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던 커피가 남아 테이크아웃해서 가져왔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 앞 선반에 잠시 올려둔다는 게 허겁지겁 올려둔 탓일까 바닥으로 쏟아졌다. 으악 내 커피 "이럴 줄 알았으면 오면서 마실 걸" 마른걸레로 아까운 커피를 닦는데 냄새는 좋네, 김치국물 안 쏟은 게 어딘지. 이미 벌어진 일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흐트러진 내 집중력과 손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신랑 옷을 집어 옷걸이에 턱 걸쳐놓고 모기약 전원을 끄고 청소기를 돌렸다. 곳곳에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나뒹굴고, 아이들 장난감은 제자리에 놓아야 하는데 허리 한번 숙이는 일은 번거롭다. 흔적들이 뚝뚝 떨어져 있다. 흔적들은 북적북적하다가 청소기 소리에 묻혔다. 쭉 밀고 나가던 청소기에 제동이 걸리면 일의 속도가 느려진다. 제동 걸린 김에 음악을 틀어야겠다.
유튜브 음악 리스트를 보다가 홍콩영화 속 올드재즈, 올드 팝을 골랐다. 치파오를 입은 아름다운 장만옥과 양조위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이번엔 중경삼림이다. 금성무를 보며 그 시절 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다 있나 생각했다.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온다. 짧은 커트머리 호기심 어린 큰 눈동자에 상큼한 왕페이가 리듬에 맞춰 춤을 출 것 같지만, 일하던 식당 주인이 나에게 빨리빨리 외치는 장면이 그려진다. 후 청소가 마무리 됐다.
물도 한통 남고 보리차를 끓여야지. 주전자 한통 가득 물을 담아 팔팔 끓을 때까지 세탁기를 돌려야겠다. 아이들 옷은 빨아도 줄지 않는 샘 같지만, 이번엔 어른 옷을 빨아야 할 차례다. 검은색 옷을 담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검수한다. 이봐 이봐 담배! 여기서도 그를 본다. 아이들 옷 주머니에 종이그림을 넣어 났는지 갈기갈기 찢겨 옷에 다닥다닥 붙어 떼어내느라 으아악 머리에 쥐가 난 걸 생각하면 철저한 검수가 필수다. 띠리링 버튼 누르고 물소리가 들린다.
아침 겸 점심은 정해졌다. 어젯밤 11시에 라면 먹는 장면을 봤지만 (밤에 라면 먹는 장면이 나오면 참기 힘들다.) 저녁에 고 칼리로 배를 채웠기에 아껴뒀다가 드디어. 라면 물을 올리고 끓을 때쯤 주전자 물도 거칠게 끓어올랐다. 양쪽에서 더운 김이 솟아올라 습하고 끈적끈적하고 아주 난리다 난리. 더운데 목마르면 탄산수로 대신하고 저녁에 끓일 걸 그랬나 싶지만, 더워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니 생각날 때 하는 게 좋다. 라면 물이 끓어 면과 분말스프를 넣고 깔끔한 국물이 먹고 싶은 날이라 계란은 넣지 않았다. 그리고 곧장 냉장고 문을 열어 얼마 전 담갔던 오이소박이를 꺼냈다.
이 오이소박이는 나만 먹어야 할 운명이다. 평소 김치종류를 잘 담그지는 않지만 신랑이 먹고 싶다고 하여 담근 그 오이소박이. 간이 짜게 된 탓에 짠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는 안 먹겠단다. 흥. 정성을 생각해 먹어주면 안 되나 싶지만, 인간이 목구멍에 넣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꿀꺽 넘기는 건 고통이며 머리로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 더군다나 꼭 없어도 되는 재료는 빼도 무방하다는 주의인 나와 달리 없는 재료가 들어가야 맛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마트로 향하고 음식도 잘하는 편이라 (그냥 쫌 먹지. 그럴 때가 있지만) 나라고 그런 부분이 없겠나 싶어 넘긴다.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있으면 정성스레 해주는 그가 어딘가.
무엇보다 지금은 살 부비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삶이라 연애 초반 알콩달콩한 시절을 꿈꾸는 것도 힘들지 않나 싶다. 서로를 위해 생각할 시간을 기다려 주기도 하고 배려해 주기도 하다가 폭발하기도 하고 가끔 그러는 우리가 귀여운 한 쌍 같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고. 놀이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다람쥐통 마냥 빙글빙글 돌고 돌아 그 자리에 멈춰서는 모양새랄까. 공평하게 어퍼컷을 날리는 사이좋은 사이랄까. 이번엔 내가 먹고 싶은 파김치를 담가볼까 이야기했더니 담그지 말란다. 하하 오기가 생긴다. 조만간 담가볼까? 짠 오이를 조금씩 베어 물고 얼큰한 국물도 마시고 밥 반공기만 말까 하다가 참았다. 일 년 365일 하는 다이어트는 그냥 유지 수준이다. 처녀 적 몸무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여기서 더 찌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에어컨은 고장이 났다. 몇 달 전에 미리 점검받을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서비스 신고를 해도 일주일 걸린단다. 일상에 작은 부분을 놓치면 이리 찌는 더위에 미적지근한 선풍기에 기대어 땀을 흘려야 하니 불편함은 덤이다. 눈앞에 보이는 식탁을 정리할까 한다. 집에 사람이 오면 안 치우려야 안 치울 수 없다. 당장 보이는 과자 봉지와 빨대 약들을 분리해 정리하고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리니 금세 깔끔하다. 안 보이는 구석 먼지도 방문하는 기사님이 에어컨 전기코드를 만져야 하니 닦아줘야 한다. 마치 이 집은 원래 깔끔한 집인 것처럼. 한두 번 다니시지 않아 아실 테지만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니 어느 정도 정리는 해둔다. 오늘도 이렇게 흘러간다.
작년 초가을 써둔 글을 꺼내봤다.
글 말미 더워도 너무 더워 흘러내리는 기분 자주 느끼던 여름이 가고 있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고 있다. 몇 해가 될지 모를 여름에는 유연한 사람으로 만나자고. 유연한 사람으로 만날 수 있을까?
글쎄.
몇 해가 될지 모를 여름은 현재진행형이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미적지근한 선풍기만 열일 중이다.
찰스 부코스키의 Let it enfold you
평온이든 행복이든 그댈 감싸게 하라로 시작하는 시다. 영화 뷰티풀 보이에서 티모시샬라메가 마지막에 읊는 시가 좋아 필사했었고, 나만 보는 거라 날림인 부분도 있어 부끄럽지만 직관적이고 멋있는 시라 올려본다. (아마 찬란한 젊은이 티모시샬라메가 읊어줘서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