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병든 수캐 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19

by kacy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

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

이 까만 어매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로 나가서는 돌

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내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 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이 시를 읽으면 반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납니다. 자기 귀를 스스로 자르고는 붕대로 칭칭 감은 얼굴을 그린 그림 말입니다. 옛날 서양 화가들은 귀족이나 부자 상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것으로 그들 생계의 상당 부분을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가 자신의 자화상도 많이 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인들도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꽤 남기고 있습니다. 이 시 말고도 윤동주, 박두진, 박종화, 천상병, 노천명, 박용래 등 그리고 최근 시인들까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고흐의 자화상과 같이 이 시인의 ‘자화상’도 어쩌면 시인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는 상황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미당 서정주의 평전이나 자서전 등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고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미당의 부친은 당시 호남 제일 부자인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인집의 소작농과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해 주는 관리인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를 여기서 ‘종’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당시 마름은 주인 집안의 어린애들에게도 존댓말을 해야하는등 그 지위가 하인에 다를바가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시인은 당시 아버지의 이 마름 일을 아주 싫어해서 결국 부친이 그 일을 나중에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먼저 어릴 때의 집안 풍경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주인집 일로 귀가가 매일 늦으시고, 나이 많으신 할머니와 동생을 가진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인과 마당엔 대추나무가 한그루 있을 뿐이군요.


스물세 해 동안 시인을 기른 건 팔 할이 바람이랍니다. 시인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닐 때 학생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고향 전라북도 고창으로 내려가 거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또 같은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의 떠돌이 비슷한 생활을 합니다. 누가 어디 취직자리를 구해주어도 겨우 3, 4개월 버티다가 때려치우기를 반복하는 그런 생활을 했으니 자기를 기른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아주 딱 맞는 표현을 했군요.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건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고향에 있는 부친 집으로 내려가서 지내다가 좀 살만해지면 집안의 돈을 훔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길 몇 번이나 합니다. 그러니 자기도 그런 행동들을 생각해서인지 지난 스물세 해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눈에서 죄인을, 어떤 이는 그의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간다고 합니다. 20대 초반의 그에게 이 구절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스스로 자기의 죄성(罪性)과 어리석음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야말로 그의 평생에 걸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의 어떤 행적에 대한 예언적인 말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의 일제 말기의 몇 편의 친일 시, 그리고 모 정권의 대통령에 대한 찬양시, 이 두 개의 일로 말미암아 그가 죽을 때까지 받았던 수모를 예견한 듯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는 이런 룸펜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시는 써서 신문사나 문예지에 투고를 합니다. 그러다가 21세 때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됩니다.

그는 20세 전부터 시를 써 비교적 이른 나이인 26세 때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을 출간합니다. 그리고 이 ‘자화상’을 이 시집의 첫 장에 실었습니다.

‘화사집’을 읽어보면 여기 시의 마지막 연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첫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원초적 생명력, 또는 퇴폐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관능미 같은 원색적인 것들입니다. 여기 마지막 연에서 자기의 시에는 몇 방울의 피가 항상 섞여 있다거나, 병든 수캐 마냥 헐떡이며 왔다는 표현 등이 20대 청년기 시인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고 이런 시적 자아의 표현이 ‘화사집’에 수록된 시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시는 시인의 어린 시절과 초창기 시인으로서의 내적 갈등과 방황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남긴 시는 총 1,000편이 넘고 시집도 15권이나 됩니다. 그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그의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시로 표현한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시적 언어가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가능성을 최고도로 넓힌 시인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저는 항상 서정주 시인을 보면 그 대척점에 윤동주 시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20대 청년으로 또 같은 시대를 산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시를 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두 시인이 ‘자화상’을 쓴 나이가 똑같이 스물셋일 때입니다. 두 시인 사이에 서로 같은 것은 아마 이것 하나 뿐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8화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