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18
알 수 없어요.
만해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의 푸른 이끼를 거처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의 제목은 ‘알 수 없어요.’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해 ‘누구의 발자취, 얼굴, 입김, 노래 그리고 시입니까?’하고, 시를 읽는 사람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십니까.
여기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생각은 어떤 절대자에 대한 구도적(求道的) 표현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푸른 하늘’ ‘작은 시내’ ‘고요한 하늘’ ‘떨어지는 해' ' 저녁놀' 등, 광대한 자연의 현상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럴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시에 대한 평론에서 위와 같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발자취와 얼굴과 입김과 노래와 시라 연상할 때, 그 '누구'는 현상 너머의 세계에 속해 있는 형이상(形而上)의 존재인 것이다.”(1)
“이 시는 대자연을 거느리는 어떤 절대의 힘이 이루는 조화의 묘 앞에 스스로의 존재의 미약함을 보이고 있는 시임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2)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무엇보다도 불교에 출가한 승려입니다. 여기 이름 ’용운(龍雲)도 그의 본명이 아니고 출가해서 받은 법명(法名)입니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 다수의 불교 서적을 집필하고 많은 불교 논문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시인이 어떤 절대자나 형이상의 존재에 대한 염원이나 동경으로 이러한 시를 지었을까요? 결코 그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도 절대자로 보지 않으며 누구나 득도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어떤 절대자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로 우리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여기 ‘알 수 없어요’는 ‘모르겠어요’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질문을 받고 ‘그것이 혹시 ooo 인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면 그 무엇이 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이 ‘알 수 없어요’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말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지금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읽어볼까요.
1 연에서, 공중에 떨어지는 낙엽이 누구의 발자취인가 묻고 있습니다. 참 막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잎이 떨어지는 오동나무는 옛날 누군가가 심었으니 이렇게 커서 가을이면 낙엽을 떨구고 있을 것입니다. 이 오동잎이 그 사람의 발자취라고 해서 틀린 답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緣起論) 즉, 모든 현상은 독립, 자존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어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의미로, 이러한 불교의 핵심 이론을 이런 질문 형식으로 독자에게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권하는 그런 시 구절이 아닐까요.
2 연에서는,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검은 구름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이냐고 묻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이라는 시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이처럼 장마 끝에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 내고 그리워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또는 비바람에 흔들리며 가던 뱃사람들은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에서 뭍에 두고 떠나온 가족의 얼굴을 떠올릴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한갓 스쳐 지나가는 조그만 현상에서도 그것을 우리 인간의 삶과 관계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연에서는, 푸른 이끼와 옛 탑 위를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또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산속의 숲에 들어가거나 어디 산사(山寺)를 지날 때 자주 그윽한 향기를 느낍니다. 이 향기야 자연의 각종 나뭇잎과 풀 그리고 또 온갖 꽃에서 나는 향들의 집합적 냄새이겠지요.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이러한 온갖 향기도 옛적 무엇인가가 썩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풀과 나무와 꽃으로 생겨나서 향을 낸다고 한다면,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누군가의 입김이라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4 연의 작은 시냇물이 흐르며 내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옛날 누군가 부르던 노래를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또한 이 자연의 소리도 수천수만 년을 지나며 이루어진, 우리가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합창하며 내는 노래는 아닐까요.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5 연의 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또 누구의 시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분명 자연이 만들어내는 현상이지만 이 또한 태양과 지구가 수억만 년의 랑데뷰로 만드는 시적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1 연에서 5 연까지의 질문은, 현재의 한순간의 모든 현상들은 우리들 자신과 주위의 모든 과거가 포함되어 있다는 불교 사상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연입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이 시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시구입니다. 이 시에 대한 어떤 평론에서는 이 표현을 두고 ‘역설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역설적 표현이라고 할 수 없는 불교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불교의 연기론으로 보면 아주 당연한 말이 됩니다. 즉 우주의 변화는 무상(無常)하며 생멸(生滅) 변화하는 것으로 이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서 이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서 그것이 생긴다.’는 그런 뜻입니다. 타고 남은 재가 있어야 기름이 있을 수 있고 또 기름이 있어야 재가 생긴다는 이치입니다. 그럼 시인은 여기서 왜 이런 시구를 쓰고 있을까요. 이것은 바로 위의 1 연에서 5 연까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등불인지를 묻습니다. 만해의 타는 가슴은 이 민족 위에 지워진 굴레를 벗고 해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말하겠지요. 이렇게 작고 약한 등불이 모이고 합해서 이 짓눌린 민족 위에 놀라운 광복의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마지막 구절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도, 나를 위해 밤새도록 혹은 새벽에, 약한 등불 아래에서무릎 꿇고 기도하던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그 작은 눈물과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아닌지 ‘알 수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종훈. 정밀한 시 읽기. 서정시학 2016. 51쪽
송하선. 한국명시해설. 푸른사상. 2005. 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