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17
산유화(山有花)
김소월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1925)
제가 사는 동네에 들어오는 길목 모퉁이에 까만 돌판에 흰 글씨로 이 시가 새겨져 있는 조그마한 시비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지나다 보일 때도 있지만 못 보고 지날 때가 더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날은 혼자서 속으로 이 시를 암송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소월은 시집 한 권을 유일하게 남겼습니다. 그 시집이 ‘진달래꽃’입니다. 그리고 시집의 첫 번째 시가 바로 ‘산유화’입니다.
시를 읽으면 내용을 감상하기 전에 자연스러운 리듬이 먼저 느껴지지 않나요? 이렇게 이 시는 리듬 또는 운율을 살리기 위해서 행을 길게 하지 않고 짧게 짧게 행갈이를 합니다. 그리고 한 행에서도 리듬을 살려 시어를 선택하고 배열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 봄 여름 없이’라는 구절이 이렇게 운율을 살려서 쓴 구절입니다. 어느 여류시인이 중학교 때 국어 시간에, 왜 봄 여름 가을 순서로 쓰지 않았느냐고 선생님께 질문했다가 야단을 맞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뭐 야단맞을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제 시 내용을 한번 볼까요. 시에 사용한 시어들이 사실 너무 평이해서 특별한 해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서정시는 서정시 나름으로 독자가 읽고 그냥 무슨 느낌이던 느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슬픈 느낌이던 아름다운 느낌이던 또는 외로움 그리움 쓸쓸함 등등 나름의 어떤 느낌이 오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평론가는 대체로 이 시에 대한 논평으로 ‘산에 있는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형상화’하고 있다거나, 이 작품을 형이상학적 세계관으로 보아야 한다거나, 또는 자연의 순환논리를 말하고 있다고도 풀이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느낌이 드시나요?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시인 내면의 정서나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꼭 무슨 철학적 의미를 찾아내서 존재니 고독이니 형이상학이니 하는 평론가는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철학자가 시인일 수는 있지만, 시인이 꼭 철학자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 시에 대한 느낌을 굳이 이야기한다면, 미국의 추리 소설의 창시자이자 시인이었던 에드가 앨런 포가 말한 ‘시는 리듬을 통한 아름다움의 창조이다’라는 명언을 생각나게 하는 시입니다. 김종삼 시인의 ‘북 치는 소년’이라는 시 속에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이라는 시구가 나옵니다. 이처럼 그냥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시의 리듬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시는 좋지 않은가요?
시골, 산 가까이 살면 산에 사는 새들을 자주 봅니다. 꿩, 직박구리, 뻐꾸기, 딱따구리, 산까치 같은 새들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작은 새는 아닙니다. 이런 새들은 아주 커서, 산까치처럼 한 번에 수 십 마리씩 때를 지어 다니다가, 집 앞에 있는 나무를 점령하고 앉아서 서로 울어대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좀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산이나 숲에 사는 작은 새로는 딱새나 박새, 동고비, 곤줄박이 또 오목눈이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라는 구절이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표현이 아닐까요.
누구는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에서, 여기서 우는 것이 새가 아닌 ‘자아’가 우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뭐 꼭 굳이 그렇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가 항상 운다고 표현하지만 서양사람은 노래한다고 표현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시에서 새가 운다고 하면, 시의 정황이 좀 애조를 띄게 되지만 이 시가 서양사람이 쓴 시라면 그 반대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한 마리 새’에서는,
모진 바람 속에도 더욱 달콤한 소리
아무리 심한 폭풍도
많은 이의 가슴 따뜻이 보듬는
그 작은 새의 노래 멈추지 못하리.(희망은 한 마리 새. 부분)
이렇게 작은 새의 울음(노래) 소리에서도 희망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월의 이 시에서의 새는 어딘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박목월 시인은 친구와 남산 길을 걷다가 ‘산유화’ 시비가 있는 곳을 지나면서 친구에게 “‘산유화’가 소월의 대표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는 글을 예전 어디에서 읽은 것이 기억납니다. 한국 초기 서정시인, 이 가운데 가장 담백하게 자연을 노래한 목월에게 이 시가 주는 느낌이 남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소설가 김동리도 이 시를 평하여 “그 형식적 구성, 특히 음률적 구성에 있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의 주옥편으로도 이와 겨루어 낼 만한 작품을 찾을 수가 없다. 더 기탄없이 말한다면 아마 조선의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한 개 최상급의 해조(諧調*)를 보여 주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산유화’가 발표된 지 꼭 백 년이 됩니다. 시인이 떠난 지 오래지만 그가 남긴 시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시는 영원히 우리와 함게 할 것입니다.
*해조: 잘 조화됨(harmony), 즐거운 가락(melo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