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16
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이 시의 화자는 한 여인인 듯한 사람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막 봄이 시작하려고 합니다. 화자는 동내 어귀를 지나는 개울가에 나와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봅니다. 그런데 개울가에 아주 털썩 주저앉아 있군요. 그리고 여인은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나와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화자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안쓰러워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지요. 아니 설혹 물어보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털썩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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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풀이 돋아나오고 봄바람에 개울물은 잔잔히 헤적이지만, 이건 화자에게나 보이는 모습이고 이 여인에게는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 잔물결 위에, 가버리고 없는 그 사람의 얼굴만 흔들릴 뿐일 테니까요. 그래서 화자는 생각합니다. 분명히 누군가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는 그런 약속’을 하고 떠난 사람이 있으리라고. 화자도 좀 뭔가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저리도 가련하게 기다리는 모습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떠나면서 ‘나 아주 가는 건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가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어정쩡한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다시 온다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에서 이런 미심쩍은 사람과 엮길 때는 없기를 바라야겠지만 이 사람이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의 상황처럼 난감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을 겁니다.
날마다 개울가에 나와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화자는 화자의 생각이 틀림이 없다고 믿고 있군요. 분명히 그 떠난 사람이 이 여인에게 그런 미덥잖은 말을 하고 갔을 것이라고. 꼭 돌아온다는 믿음을 주는 말을 하고 떠났다면 저렇게 개울가에 나와 철버덕 주저앉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제 마지막 연입니다. 화자는 이 여인을 보면서 ‘아주 가지는 않노라’는 그런 말을 하고 떠났을 것으로 자기가 생각해 내고는 다시 이 말이 혹시 그냥 잊지나 말라는 그런 뜻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사실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혼자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생각에 빠진 사람과 대화하기가 좀 그런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잊지 말아 달라는 부탁은 또 무엇인가요. 참 너무 염치없는 그런 말 아닌가요. 이렇게 사랑은 상식적이지 못하며 아이러니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라면 이 대목에서 이렇게 쓰고 싶은데 말입니다.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어 달라는 부탁인지요’ 이렇게 말입니다.
이 시의 후속으로 소월의 ‘먼 후일’을 읽어 보시면 여기 개여울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던 사람이 혹시 ‘먼 후일’ 속의 화자처럼 기다리다 지쳐서 당신을 ‘잊었노라’라고 선언하지는 않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여기 소월의 시 ‘개여울’은 이제는 결코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이제는 거저 한 마디의 메일이나 한 통의 전화로 매듭지어질 일이니까요. 그러나 100여 년 전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얕은 개여울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면 아련히 남아있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러나 이제는 보기 힘든 그런 정경을 그린 시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옛날의 연인 사이의 이별의 모습을 좀 현대적 버젼으로 말하는 글이있어서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 글을 옮겨 봅니다. 그러니까 이별의 말로 '가도 아주가지는 않는거야.'라는 말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마치 도깨비불의 꼬리처럼 여운을 남기며 쉬익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헤어지면서 그가한 인사는 이랬다고 한다. '또 전화할께.'
'또 전화할게'는 최고의 작별 인사다."(1)
이 시의 각 연의 행을 비교해 보면, 각 연의 첫 행은 대체로 3.4조로 되어 있습니다. 각 연의 두 번째 행은 2.3조 또는 다섯 글자로 되어 있고, 각 연의 세 번째 행은 3.4.5조 또는 4.3.5조로 짜여 있습니다. 이렇게 이 시도 소월 시의 그 음악성이 뛰어난 시입니다.
이제 가수 정미조의 ‘개여울’을 한번 들어 볼까요? 아니면 심수봉이 부른 것도 있습니다. 아니 요새는 아이유도 불렀더군요. 어느 가수가 우리의 심경을, 아니 여기 앉아 있는 여인의 마음을 더 울려줄지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 다나베 세이코. 인생은 설렁설렁. 바다출판사. 2018. 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