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15

by kacy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라도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이 시를 처음 읽어보면 사랑하던 사람과의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랑하면서도 그와 그동안 또 이런저런 섭섭한 감정이 많았지만, 그러나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뭐 그냥 조금만 섭섭한 것처럼 그렇게 말하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지금은 인연이 없지만, 어디 다음 생에는 연이 닿아서 또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말은 그 사람에게 아직 좀 미련이 남아 있다는 표현인가요, 아니면 떠나면서 상대방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그러는가요. 이것에 대한 대답은 좀 미루어 두고 그다음 연으로 가 보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연꽃과 바람이 나옵니다. 연꽃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바람이 왔다 갔다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지만,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연꽃 입장에서는 좀 신경이 쓰이는 일입니다. 이 바람이 지금 다른 연꽃을 만나러 가는 건지, 나만 보고 그대로 그냥 가는 건지 말입니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연꽃을 만나고 떠날 때도 딴 연꽃을 만나려 떠나는 듯한, 그런 뻔뻔한 얼굴이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휙 하는 바람 소리도 내지 말고, 그냥 언제 떠났는지 연꽃도 모르게 무심히 떠나자고 합니다. 어제 만나고 바로 오늘 떠날지언정 그 주변을 한동안 머물다 떠나는 듯하자고 말합니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만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대로 우리도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 헤어져야 할 때 이렇게 무덤덤하게 어디서 또 만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앞에서 생각한 상대에 대한 미련이나 배려 같은 것은 뛰어넘는, 그런 유유자적하는 삶의 태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자, 그런데 이 시를 여러 번 다시 읽어보면 위에서 감상한 그런 사사로운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한 생의 끝에 맞닥 뜨리는 것. 이별 즉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주 많이 섭섭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발버둥 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좀 섭섭한 듯하게 우리 마음을 다잡아 먹자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제 막상 죽음에 다다라서는 그래도 내생에 다시 한번 더 태어날 것을 생각하면서 담담하게 이를 맞아들이기를 바라는 그런 표현으로도 읽힙니다.


이제 이 세상의 삶을, 그래도 연꽃이라도 만나고 가는 듯, 뭐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꽃이 주는 이미지만큼 그 삶이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정도라도 말하려면 내 삶을 내가 그런 어느 물 위에 떠서 피어있는 연꽃 주변이라도 머물다 온 것같이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로도 풀이됩니다.

그리고 이 연꽃을 비록 오래 가까이하지 못했을지언정 그 주변에서 그래도 꽤 오래 머물렸던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떠나자는 그런 말이 아닐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연꽃의 의미나 윤회사상이니 하는 것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시가 말하려는 것을 이렇게 해석해도 잘 이해하게 됩니다.


서정주 시인은 이 시에 대해서 직접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 10여 년, 저승이라는 것을 이승과 아울러 많이 느끼고 생각해 왔고 또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갈 때에 덜 섭섭하게 넘어갈 연습을 상당히 해왔다.”(1)고 말합니다. 그는 또 “우리는 죽을 때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가지고 가지 못한다. 다만 마음을 남겨 딴 사람들이 남긴 여러 마음들 속에 한몫 끼어, 영원히 우리 후대의 마음속에서 살아갈 뿐인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진 내 마음이 한 천년을 지난 뒤에, 어느 비 오는 오후쯤 어느 대폿집에 앉아 있을 어느 낯 모를 청년의 마음속의 그 많은 내용들 가운데 한 극소수 부분으로서 이름도 없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런 영원의 여행은 참 재미있다.”

시인은 이런 생각과 느낌의 한 토막을 가지고 이 시를 써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50대가 되어서 발간한 그의 다섯 번째 시집 ‘冬天’에 수록된 시로, 그의 시적 완숙기의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서정주. 미당 서정주 전집 11. 나의 시. 은행나무. 2017. 174~175쪽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4화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