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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29

by kacy

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 서정주의 시는 어떻게 보면 우리 삶에서의 온갖 사랑 이야기, 그중에서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이 그의 많은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에서 보이는 원시적이고 육감적인 시도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동천'도 그 첫 행의 '우리님의 고은 눈섭'이라는 표현으로 보아도 또 다른 사랑 이야기 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처음 3행과 뒤의 2행을 연결하여 해석하기가 그렇게 만만치가 않은 것이 처음 이 시를 대하는 독자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5행 밖에 안 되는 짧은 이 시에 대한 평론가 및 시인들의 평가는 의외로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높다. 높을 정도가 아니라 극찬에 가깝다.

"동서고금의 하고많은 시인들이 달을 두고 시를 써왔다. 그중 몇 편을 꼽으라면 한 손에 빠지지 않을 절창이다. 다섯 행의 짧은 시인데도 온 우주를 울리고 있다. 시학도들이 시를 배우고 시인들도 자신의 시를 경계하고 가다듬을 때 가장 많이 참고하는 시이다. '서정주를 통하지 않고는 시에 이룰 수 없다'는 우리 시단의 통설을 낳게 한 시가 바로 이 '동천'이다."(1)


"병장 첫 봉급을 받고 춘천 시내로 나가 책 한 권을 샀는데, 그 책이 바로 서정주 시집 '동천'이었다. 나는 '동천'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서정주 시인을 결정적으로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우리 시에 있어서 전통적 정서와 가락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군인교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군대의 밤을 보내면서 '동천'에 배어있는 민중적 한의 가락과 숨결을 발견한 것이다."(2)


한 편의 시가 우리 민중의 가락과 숨결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온 우주를 울리고 있다는 평가는 이 시의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이 시의 어느 부분도 어떠한 어려운 표현도 없는 너무나도 평이한 진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각 행들의 의미는 상당히 추상적이라 그 의미를 전달받기가 그리 쉽지 않다.

두 번째 행 '즈믄(천의 옛말)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의 표현은 '천일 동안 밤마다 꾸는 꿈 속에서 사랑하는 임의 눈섭을 맑게 씻는다'는 행위가 뜻하는 바는 우리에게 그리 만만치 않게 다가온다.

세 번째 행에서, 이 맑게 씻은 눈썹을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 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상상 속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님의 눈썹이 승화하여 하늘에 초승달로 다시 태어났다는 화자의 지극히 초현실적 발상을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그 깊은 뜻을 가늠하기가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것이다.


이제 마지막 두 행에서는 느닷없이 밤하늘을 나는 매서운 새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새의 모습을 묘사한다. 우선 여기서 '그걸 알고'의 '그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초승달이 그냥 초승달이 아니라 어떤 이의 사랑하는 눈썹이라는 것을 새가 알았다는 것일까. 혹은 화자의 그 지극한 연모의 마음을 알았다는 것일까.


서정주 시인은 이 시를 쓰고 십여 년이 지나서 그의 어떤 글에서 이 시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서 어떤 한 여인에 대한 연정의 불을 태우기 시작하여 이 학질을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서만 한 5, 6년 마음속으로 앓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십 대 말 여드름 시절의 이 늦은 재현, 대단히 쑥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쑥인 데로 이것이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골치였다."(3)고 고백한다.

그는 이런 학질 같이 떨어지지 않는 연정을 식혀내려고 그의 집 인근의 겨울 마포 서강의 얼어붙은 강둑을 새벽에 헤매고 다니다가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 된다.

"어느 아침이던가 흐린 하늘 한복판에 묘하게도 눈썹이 매우 의젓하고 단호하게 느껴지는 꽤나 큼직한 새 한 마리가 유유한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날으는 곡선들도 무슨 이쁜 눈썹들만 같았다."(4)

이렇게 '동천'의 시상이 싹이 트이기 시작했고, 여러 해 지나는 동안 비밀히 그의 마음속 연정도 가라앉아 가면서 이 다섯 줄 시가 탄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 여인이 여대생이었음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시인은 모 대학의 강사 시절이었으니 그의 제자였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 시어 중에 '눈섭'은 시인이 항용 사모하는 여인의 상징으로 너무나 자주 사용되는 시어입니다. 이 시가 실려있는 시집 '동천'의 50편의 시 중에서 '눈섭'이 나오는 시는 모두 일곱 편이나 됩니다.


시인이 당시 얼마나 그 여대생에 대한 연정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는 그 새의 나르는 곡선 까지도 그녀의 눈썹으로 보였을까를 생각하면 당시 그녀에 대한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제 다시 시로 돌아가서 보면, 이 시의 어디에도 이러한 그의 고통스러운 열병의 흔적은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고고한 가락과 높은 정서로 승화된 동양적 밤하늘의 정경을 보고 느낄 뿐입니다.

시인의 다른 시 '신록(新綠)을 읽어보면 당시의 시인의 마음을 조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록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으라!


천지엔 이미 꽃닢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 번 나를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닢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으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으라.


이렇게 꾀꼬리처럼 어디 누구에게 울지도 말하지도 못할 사연이, 십년 까가운 세월을 지나 아름다운 시로 탄생한 것을 봅니다.








1. 이경철. 서정주 평전. 은행나무.2015. 359쪽

2. 정호승.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서정주시집'. 내 스무살을 울린 책. 작가정신.1998. 66~67쪽

3. 서정주.미당 서정주 전집2 산문. 은행나무. 2017. 179쪽

4. 위의 책.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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