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 때 보던 엄마는 확실히 전 보다 호전되고 있었다. 의식을 차렸고 나를 알아봤고 끄덕끄덕 고갯짓으로 하던 의사소통에서 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정신도 이전보다는 명료해지는 것 같았지만 간병하면서 알게 된 건 면회 때는 컨디션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경련 후 엄마가 얼마나 안 좋아졌는지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때 일로 서로 책임전가를 하는 간병인과 간호사실의 태도를 본 후 무서워진 것이다. 잘못된 일이 발생되어도 내가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서라지만 보호자는 병실에 들어가서 환자를 볼 수도 없고 그나마 면회장에서 면회라도 가능하면 다행인 상황에서 엄마 상태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온전히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인수인계를 하면서 간병 들어갈 준비를 했다. 연말이라 인사고과가 신경 쓰였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원래라면 엄마가 재활을 받다가 집으로 오기 전 휴직계를 내려고 했었다. 생각보다 빠르긴 했지만 그렇게 간병을 시작하게 되었다.
간병인과 그동안 대화에서 묘하게 주제에서 어긋난다던지 하는 위화감은 비단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던 듯했다. 간병을 교대하고 내가 엄마를 치료실에 데리고 갔을 때 치료사분들이 한결같이 잘 오셨다는 반응이었다. 치료사분들은 간병인을 치료 전 후 잠시만 보는 게 전부고 병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는데도 간병인이 그다지 좋은 분은 아니었다는 뉘앙스로 잘 교대하셨다는 말들뿐이었다. 더 깊게 물어보진 않았다. 깊게 알아봐야 이미 지나간 일이고 속상하기만 할 뿐 변하는 건 없으니 굳이 다시 상기하고 싶진 않았다, (엄마를 학대했다던지 그런 건 아닌데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고 엄마를 깔끔하게 씻기거나 신경 써서 봐준다는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다)
엄마는 이제 엉덩이에 힘!이라고 하면 엉덩이를 살짝 들어줘 기저귀 갈기도 조금은 수월해질 정도였다. 다만 경련 직전보다는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고 헛말을 하는 섬망이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일반식을 먹었는데 경련 후 연하장애가 생겼다. 5주간 재활을 하며 보였던 호전반응이 경련으로 1/2 정도 사라진 것이다.
간병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밤에 2시간마다 일어나 체위 변경을 해주고 기저귀를 가느라 잠을 못 자는 것보다, 엄마 밥 먹이는 게 2시간이 걸리는 것보다, 지하 치료실에서 9층 병실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정신이 명료하지 못하고 자꾸 헛말을 해대고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엄마는 두식구 먹을 김장도 혼자서 다 할 만큼 손이 빠르고 깔끔한 성격이라 언제나 집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부지런을 떠는 성격이었다. 여자 홀몸으로 아빠와 살 때 생긴 빚을 갚고 나를 키워냈고 가난에서 버티고 버텨냈던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이젠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아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섬망까지 와서 커튼을 보면서 웅얼거린다던지 허공에 대고 헛말을 한다던지, 나를 사촌동생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나를 사촌 동생 이름으로 부를 땐 덜컹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앉았다. 치매인가.. 정말 인지나 정신은 돌아오지 않을까..
엄마가 당신의 딸을 못 알아본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못 걸어도 인지만은 나만은 꼭 알아봐 주길 바라고 바랬는데.. 처음 호전을 보이고 눈앞에 잠시 펼쳐졌던 희망의 불씨는 꺼졌고 난 그대로 암흑 속으로 들어갔다.
연하곤란이 생기고 식사는 미음과 국, 동치미 국물과 푸딩으로 대체되었다. 그마저도 맛이 없으니 정말 먹질 않았는데 식사량이 이상태면 콧줄 다시 해야 한다는 전공의 말에 아차 싶어 정말 죽기 살기로 먹였다. 엉덩이에 살이 빠져 앉기만 해도 꼬리뼈 때문에 아프다고 자꾸 드러누우려는 엄마, 밥 먹는 동안 입에 물고 삼키진 않고 옆으로 누우려고만 하는데 정말 환장하는지 알았다. 재활 시간도 맞춰야 하는데 미음을 입에 문채로 자꾸 커튼 가리키며 저거 이거 하면서 웅얼거리기만 했다. 제발 꿀꺽 삼키라고 애원해도 들리지 않는지 웅얼거리기만 했고 애원하다 하다 콧줄 다시 할 거냐고 성질을 내기도 했다. 한 끼에 두 시간 하루 총 여섯 시간을 밥 먹는 데 사용했다. 내내 서서 먹이니 다리는 붓고 당연히 내 식사시간은 따로 챙기기 힘들었다. 처음 2~3일은 커피와 에너지바로 버티다가 이후엔 샌드위치만 사다가 먹었다. 엄마 몸무게 재다가 나도 재보니 2주 만에 8킬로가 빠져있었다.
밤이 되고 불이 꺼진 후 좁은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낮엔 바빠서 느끼지 못했던 잡념들이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곤 했다. 월 400~500만 원 정도의 간병비와 거기에 추가되는 병원비, 그리고 각종 물품비등 금전적인 압박감에 뒤척거리기도 했고, 그것보다 더 암담한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엄마 상태에 대한 생각,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 대구에서 서울로 모셔오려고 갔던 대학병원들에서 들었던 절망적인 의사 소견들도 머릿속에 떠다녔다.
낮엔 바쁘고 힘들어서 외면했던 갖가지 생각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했다.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싶다가도 당장 엄마의 똥기저귀를 갈아야 해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장기적인 계획이라고 해봤자 사실 의미가 없었다. 장기적으로 계획을 해도 엄마 상태에 따라 계획은 언제든 무산될 확률이 높았다. 이번에 휴직을 낸 것도 그랬고, 이후 옮길 병원도 원했던 2차 종합병원도 내 생각과는 다른 교수의 의견으로 가지 못하고 재활 병원으로 가게 되었으니 계획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