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서울 병원으로 온 그쯤엔 아주 사소한 것에도 그냥 눈물이 났다. 누군가 괜찮냐 힘드냐 한마디만 건네어도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한 번은 욕창방지 쿠션이 필요하다는 간병인의 말에 병원으로 주문을 했고, 그날도 어김없이 본관 택배함에서 픽업해 가져다주려고 퇴근 후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본관 택배함에 도착해서 물건을 찾는데 이상했다. 크기가 꽤 큰 박스에 포장되어 와야 하는 물건이라 눈에 안보일리가 없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다. 택배를 분실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더욱 당황했다. 택배함에 쌓여있는 여러 물건들 사이를 계속 뒤져보며 찾고 있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서러운 울음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왜 하필 욕창방지쿠션일까.. 살면서 택배를 잃어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왜 하필 꼭 당장 필요한 욕장방지 쿠션인지..
참 별일 아니었다. 배송 완료되었다고 전송된 사진 위치에 없으면 누군가 가져간 것인데 그게 뭐라고 믿기 힘든지 20분을 울면서 택배함을 뒤지고 있었다.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된 채로 택배함을 뒤지고 있는 나를 누군가 봤다면 아마 미친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땐 미쳐있었으니 미친 사람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CCTV 요청을 해보던지 택배사와 시시비비를 가리면 될 일인데 사고가 정지된 사람 같았다. 결국 다시 주문했고 분실로 처리되어 손해 보진 않았지만 그날 밤 그 쿠션을 사용하지 못해 엄마에게 욕창이 생기진 않을까 (하루 만에 생길일이 아닌데도) 쓸데없는 걱정만 가득했다.
생각해 보면 그냥 그때의 나는 변수에 대응할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회사 퇴근 후 병원으로 잠시라도 가봐야 하는 일이 많았고 그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들과 신청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기면 대응해 보기도 전에 녹초가 되곤 했다.
생각지 못한 일들은 계속 생겼고 간병인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엄마를 간병해 줄 가족이 없었으므로 개인간병을 고용했었는데 간병인이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다. 당장 내일 가봐야 한다고..
그땐 코로나가 심했던 시기라 간병 교대로 자유롭지 못하고 교대하려면 PCR 검사가 필수였다. 하루 지나야 결과가 나오는 검사인데 당장 내일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사람을 구해야 했다. 엄마를 서울로 모시고 오면서 간병인을 구할 때 진이 빠졌던 경험이 있어 사람 구하기 힘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일 당장?
지금 당장 PCR 검사를 하고 내일 결과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사람을 구하는 시간도 별 겸 내가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연락이 온 날이 목요일이었다.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반차와 연차를 낸 뒤 오후에 PCR 검사를 하러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간병인 구하는 어플에 공고를 올려두었다. 일요일에 올 수 있는 사람으로 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 슬리퍼등을 챙겨서 짐을 싸고, 유튜브로 성인 기저귀 가는 영상을 찾아보고 보호자 커뮤니티에서 석션하는 팁을 물어보곤 직접 해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계속 그려봤다.
저녁이 되니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엄마의 몸을 구석구석 훑어보고 어느 정도 상태인지, 재활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눈으로 직접 볼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욕창은 없다곤 했지만 정말 없는 건지 다른 곳에 멍이나 상처는 없었는지 치아는 괜찮은지 등등 확인해봐야 할 게 너무 많았다. 가능하면 물로 머리도 감겨주고 싶었다.
금요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저번주에 의식이 돌아와 내 말에 끄덕끄덕 거리기도 했고 간병인도 회복속도가 빠르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번엔 대화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대와 설렘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병원에 도착해 엄마가 입원 중인 병동으로 향했다. 엄마는 오전 재활 중이었다. 간호사실에 PCR 검사 결과를 보여주고 교대한다는 사실을 말하니 두 명이 동시에 있는 건 안 되니 빠르게 인수하고 나가야 한다고 안내받았다. 엄마도 재활 중이라 재활실로 빨리 가봐야 했기에 간병인에게 간단하게 중요사항들만 몇 가지 전달받았다.
소변줄 떼는 연습 중이라 잠가야 한다는 것과 경관식 주는 방법, 엄마가 누워있는 상태에서 침대보를 교체하는 방법과 기저귀 가는 방법 같은 것들이었다.
간병인은 기저귀 갈아 본 적도 없을 텐데 사람 빨리 구하는 게 어떠냐고 걱정스레 말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짜 미안했는지는 모르겠다. 급한 집안일이 생겼다는데 그 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들었지만 왠지 아닐 것 같았다. 의식이 점차 돌아올수록 다리를 움직이고 내뻗기 시작했고 대화가 원활하지 않아 협조가 안되니 힘들어서 관둔다는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이미 간 사람이기에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재활 치료실로 가니 엄마는 왼쪽 어깨 탈구 위험이 있어 맞춰야 한다던 보조장비를 차고 있었다. 손등엔 링거 주사기와 손가락 끝엔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달려있었고 얼굴엔 콧줄을 하고 있고 그 외에 목관과 소변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부릅뜨고 있었는데 나를 봐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저 눈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아직 걷지 못하는 아기가 신기한 듯 이곳 저것 살펴보는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처음 해보는 간병은 오전 재활이 끝나고 병실로 왔을 때부터 난관이었다.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기려면 리프트를 이용해야 하는데 리프트 사용하려는 환자들이 많아 꽤나 기다려야 했다. 점심시간 동안 기저귀 확인 후 경관식을 주고 물에 약을 녹여 약도 먹이고 해야 하는데 리프트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리프트로 이동을 도와주시는 주임님이 (제일 바빠 보이심) 오셔서 엄마를 침대에 옮기고 눕혀둔 다음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경관식이 데워지도록 담가뒀다. 그리고 기저귀를 확인하는데 처음부터 너무 난이도 상이다. 설사였다.
동영상으로 본 대로 기저귀를 열어 앞부분을 처치하고 엄마를 옆으로 돌려세워두고 닦는데 가만히 있질 않는다. 힘이 빠지는지 몸은 자꾸 누우려고 내려왔고 손은 소변줄을 빼려고 하다가 저지를 당하면 콧줄로 갔다가 목관도 뜯으려고 했다가 하는 등 가만있질 않는다. 변을 닦아야 하는데 엄마 손과의 싸움이었다. 엄마 제발 그거 손대면 안돼 라고 해봤지만 대화가 통할리 없었다.
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큰 아기를 돌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의사소통이라도 원활해야 내가 요구하는 대로 가만있어 줄텐데 그게 아니니 엄마 손 잡느라 정신없고 변을 닦아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기저귀를 갈고 나니 20분 정도가 지나있었던 것 같다. 경관식을 담가둔 물은 다 식어서 다시 받아와야 했고 온몸은 땀범벅이었다. 피팅하는 동안은 손 억제대를 해서 묶어둬야 했다. 몸에 있는 줄들이 불편한지 틈만 나면 뽑으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았다.
면회 때 엄마 모습에도 무너졌지만 병원에서 더 자세히 보게 된 모습은 말이 안 나왔다. 내가 묶어뒀지만 손이 묶인 채 말도 못 하고 숨조차 스스로 잘 쉬지 못하니 목에 구멍까지 나있는 엄마를 보자니 비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엄마의 모습을 거부하듯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재활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저 다 엉망이었다.
간병인에게 전달을 잘못 받아 요의를 느낄 땐 소변줄을 열어둬야 한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요의를 느껴 배 아프다고 간신히 표현하는 엄마의 소변줄을 열어주지 않았다.
또 기저귀 갈 때나 잘 때는 보조기기를 빼야 했지만 그러질 않았다. 밤새 소변에 환의가 젖어 갈아입히는데 벗기기만 하고 입히질 못해 옷을 벗겨둔 채로 30분이 걸려 추워하게 만드는 등 엉망이었다. 울면서 엄마 휠체어를 밀고 다니고 새벽엔 병동 밖으로 나가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었다. 아마도 저번 택배함 앞에서 처럼 미친 사람 같았을 것이다.
재활 시간에 맞춰 다니느라 진이 빠져 밥도 안 넘어가 그냥 물로만 첫날을 보냈다. 저녁엔 석션까지 해야 하는데 그건 정말 자신이 없어 간호사에게 도움을 받았다. 간병 들어오면 엄마 몸도 씻겨주고 싶고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고 싶었는데 그건 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당연히 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서툴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데 재활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시간 맞추기가 너무 버거웠다. 내가 잘 못하니 엄마가 힘든 건 아닐까..
처음보다 엉덩이가 빨개지고 있는 것 같고 보조기기 찬 채로 기저귀를 갈았으니 얼마나 아프셨겠냐는 재활치료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고, 설사만 하니 경관식 온도가 안 맞았나 싶어 자책만 들었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들어와 엄마를 힘들게 한 건 아니었을까.. 하루종일 엄마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미안해 미안해 제발 손 좀 가만히 있어주면 안 될까였다.
엄마가 이렇게 된 건 단 한순간이었다. 속이 안 좋았고, 쓰러졌고 이후 내 눈앞에 아기처럼 돌봐줘야 하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의식이 점차 돌아오고는 있었지만 대화는 되지 않았고 짧은 머리가 된 엄마의 뒤통수엔 수술했던 자국 두 군데에 머리카락이 비어있었다. 머리는 떡지고 얼굴도 변해있었고 눈빛은 다른 사람 같았다. 현실이 아니길 빌었다. 신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는데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 아니었다. 새벽에 보호자 침대에 누워 이 기가 막힌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고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 봤지만 아득하기만 했다. 잠도 오지 않았지만 두 시간마다 체위 변경을 해주고 기저귀도 갈아야 했기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아침 다른 환자들은 간병인들이 물을 받아와 씻겨주는 듯 첨벙첨벙 물소리가 났다. 나도 물을 받아와 어디라도 씻겨줘야 할 것 같았는데 도저히 어딜 씻겨줘야 할지 모르겠는 게 실로 답답했다. 얼굴은 콧줄을 하고 있어 물수건으로 닦아줬고 기저귀는 물티슈로 닦아줬는데 다른 분들을 어딜 씻겨주는지 모르겠다는 게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남들 물소리가 그저 부럽고 엄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엄마 얼굴 표정도 지쳐 보였다.
새로운 사람을 구하고 일요일이나 월요일 아침에 교대하려고 했지만 더 있는 게 엄마가 힘든 것 같아서 토요일 가능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고를 미리 올려둔 덕에 저녁에 교대되는 간병인을 구하고 나올 수 있었다.
하루, 딱 하루 만에 느낀 무기력함.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는 좌절감과 죄책감.. 그리고 신생아처럼 변해버린 엄마 모습이 병원을 나와서도 잔상처럼 계속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