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기 전 간병인도 엄마의 회복속도가 빠르다고 했었는데 새로 바뀐 간병인도 회복속도가 빠르다며 좋은 소식들을 전해줬다. 엄마가 재활하는 모습들을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휠체어도 일반휠체어로 바꿔서 탈 만큼 목도 가눌 수 있게 됐다. 주말에 몰래 만나는 엄마는 전보다는 눈빛이 명료해지는 것 같았고 한 주 한 주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도 점차 되기 시작했다. 묻는 말에 대답도 할 수 있었고 영상통화로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딸이라는 대답도 해줄 만큼 의사소통이 회복되고 있었다.
한 번은 간병인이 밥을 먹는 영상을 보내줬다. 회사에서 그 영상을 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몇십 년 만에 "행복" 하다는 감정이 솟구쳤다.
행복이라는 참 어색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어릴 때부터 있던 부모의 부재 그리고 지독한 가난, 친할머니의 핍박등으로 불우했던 시절을 보냈던 나였다. 어릴 적 가족과의 추억보다 떠올리기 싫은 아픔이 더욱 많은 사람. 당연하게도 쫓아다녔던 우울증..
언젠가 우울증이 심한 친구와 (나 역시도 그랬지만) 했던 대화 중에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린 어쩜 행복할 줄 모르는 거 아닐까. 감정도 학습이고 반복이라면 행복이라는 기억이 없어서 행복한 일이 있어도 행복할 줄 몰라서 불안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 난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당연히 살면서 기쁜 일도 있었지만 그게 행복하다고 말할 만큼은 안 됐고, 일이 너무 잘 풀려도 이후에 나쁜 일이 생기진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과 경우의 수를 생각하게 되는 사람.
유년시절 행복했던 기억이라곤 딱 한 가지 장면이 있다.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다. 주말이라 점심쯤 하교를 했던 것 같다. 하늘은 유독 쨍하게 맑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너무나 딱 좋은 날씨. 집에 동생은 어디 갔었는지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집은 마당에서 허벅지 정도 높이에 있는 나무문을 열면 바로 방이 나오는 구조였는데 신발도 벗지 않고 문턱에 걸쳐 앉아 다리는 밖에 둔 채로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따뜻한 햇빛으로 시야는 노란빛으로 물들었고 잔잔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엄마는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지 된장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고, 무언가를 썰어내는 듯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내 최초의 행복하다는 기억. 그 이후 행복했던 기억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해외를 처음 나가봤을 때도 회사에서 승진을 했을 때도, 집을 샀을 때도, 회사에서 성과가 좋았을 때도 행복하다는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쓰러진 엄마가 이제 드디어 입으로 밥을 먹기 시작한 그 영상을 보면서 행복하다 느끼게 된 것이다. 아직 콧줄은 하고 있고 엉성한 수저질이지만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이 보여서였을까. 아직 눈빛이 온전하진 않아 엄마 얼굴에 위화감이 남아있었지만 그 영상을 몇 번이고 보고 또 봤다. 모순적이게도 그 긴 세월 동안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엄마가 아프고 난 뒤 피어오른 것이다.
엄마는 내 이름을 처음 불러주고, 점차 말도 늘었고, 앉아있는 자세도 성공하는 듯 재활에 속도가 붙는 듯했다. 간병인은 좋은 모습은 열심히 찍어서 보내줬다.
이렇게 하다 보면 원래대로는 아니더라도 혼자서 화장실을 갈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인지도 원래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였다.
왜 친구들이 아이를 낳고 아이들 사진을 그렇게 보냈는지, 뒤집기에 성공하거나 앉기에 성공하면 그토록 자랑하고 싶어했는지 이젠 너무나 잘 안다. 그때 뇌졸중 환자의 보호자들이 있는 오픈톡방에서 많은 대화를 하면서 정보를 얻곤 했었는데 그곳에도 엄마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자랑하고, 친구에게도, 애인에게도 자랑했다. 회사 친한 언니에게도 자랑하고 그땐 정말 팔불출 같았다.
세상사람들 우리 엄마가 이제 입으로 밥을 먹어요!! 가능하다면 뛰어나가서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급성기때 재활이 효과가 가장 좋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땐 이 회복속도가 지속 될 것만 같았다.
급성기 그시기엔 엄마 회복하는 모습으로 버텼던 것 같다. 병원에서 간병은 하지 않지만 해결해야 할 일들이 꽤나 많았고 그만큼 신경써야 할 것도 많았다.
간병비에 대한 부담도 엄청 났기에 주민센터에서 지원 될만한 제도는 없는 상담 받기도 했고, 엄마의 고정지출비용들을 정리하고, 보험 가입된 내역들도 찾아보고 청구할만한 것들을 찾아봤다. 평일에 잠깐이라도 병원에 꼭 들렸고 주말엔 엄마 얼굴을 보고 오기도 했는데 한가지만이라도 나눠서 처리해줄 사람이 너무 간절했다.
그래서 변수가 생기면 대응할 에너지가 없었고 180도 바뀌어버린 일상에 적응하기도 벅찼지만 눈으로 보이는 엄마의 상태가 호전 되니 그 한가지로 버텨내고 견뎌냈던 것 같다.
서울로 올라오고 입원한 병원에선 최대 6주만 입원 가능 했기에 다음 병원도 정해야 했다. 입원장은 많이 받아뒀으나 날짜가 딱 맞게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기에 날짜 미정인 곳들도 전화를 해보고 입원해봤던 보호자들에게 후기를 듣기도 했다.
그땐 병원을 정하는게 제일 어렵고도 힘든 결정이었다. 그땐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엄마가 좋아질수도 나빠질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내 선택에 따라 환자의 상태가 바뀔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 큰 결정을 가족 중 누군가와 상의할 사람도 없었기에 혼자 알아보고 혼자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더욱 더 압박감에 짓눌려지는 것 같았다.
다른 보호자들도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병원 선택이었다. 후기를 보고 마음에 들더라도 입원 기간이 맞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입원 기간이 맞아 떨어졌더라도 항생제 내성균 검사에서 균이 발견되면 입원 하지 못할뿐 아니라 입원중인 병원에서도 퇴원조치 당하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변수를 고려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재활이 좋다는 곳으로만 가고 싶은게 모든 보호자들의 바람일 것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했고 추천 받아 이동할 병원을 정했다.
그 선택이 엄마가 쓰러진 후 내가 했던 선택들 중에 제일 돌리고 싶었던 선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