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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쁜 생각은 천천히 잠식해 불현듯 나타난다

by yeon

내가 간병하는 동안 종합병원에서 재활병원으로 전원을 한번 하게 됐다. 그동안 엄마는 혼자 웅얼거리던 섬망은 차츰 나아졌지만 여전히 새벽에 한 번씩 깨서 알아듣지 못 할 맥락 없는 말을 해대기도 했고 식사는 미음에서 간 찬과 밥으로 넘어갔다. 가장 큰 변화라면 대소변이 마렵다고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게 됐다. 기저귀에 싸기도 했지만 화장실 가서 보는 횟수가 차츰 많아졌다. 화장실 가는 길에 기저귀에 싸더라도 어떻게든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마무리하도록 했다. 호전된거지만 그만큼 나의 체력소모는 더해져 갔다. 일반 사람들이 대소변을 보는 보통의 횟수가 아니라 더 자주 갔었기 때문에 밥 먹다가도 치우고 가고, 재활 치료 중에도 화장실을 가느라 치료가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체력이 나빠지니 호전 됐다고 좋아할 겨를이 없었다. 거기에 나는 그때쯤 어떻게 해서든 회사 복귀 전에 최대한 호전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혀있었다. 재활치료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도 조금이라도 걷게 하려고 했고 누워있으려고 하면 낱말카드나 숫자카드를 읽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몰아붙였다. 엄마도 나도..

환자도 쉬어야 하고 나도 숨 돌릴 틈이 있었어야 하는데 왜 그랬는지 쉴 틈 없이 움직이게 하려고 했다.


엄마를 보고 있는 동안 애써 외면했던 과거와 마주하는 것 같아 더욱 심리적으로도 궁지에 몰렸다. 그동안 했던 모진 말들이나 한 번도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본 적 없었다는 사실들에 몸서리 쳐지게 나 자신이 싫어졌던 것이다. 언제나 힘들게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했고 여전히 가난하지만 그래도 자식들 다 키워냈는데 이젠 본인이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 당신의 인생이 가엽고 가여워 해맑은 엄마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듯 울분으로 뜨거워졌고 천 갈래 만 갈래 갈기갈기 찢어졌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나에대한 혐오..

최악의 생각들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엄마를 간병한 지 두 달쯤이었나 길게 처방이 되지 않아 아껴먹고 있던 우울증 약이 떨어졌다. 코로나19로 병원 외출이 쉽지도 않았지만 근처에 정신과 병원은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한 시간도 비울 수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했다. 불안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증상이 가장 힘들었는데 잠시라도 교대해 줄 가족도 없고 간병인은 최소 3일 이상 해야 봐줄 사람을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 회사 복귀까지 한 달 그냥 참아보려 했다.


옮긴 재활병원 병실은 매우 좁았다. 3인실이었는데 옆으로 긴 형태였다. 우린 제일 안쪽에 있는 자리로 배정되어 자연광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자리였고 코로나로 다들 커튼을 꽁꽁 쳐놓고 생활했기에 내 불안증이 심해질 환경적 요소가 다분했다. 보호자 침대는 이전 병원보다 좁고 작아서 발목 밑으로는 밖으로 나갔고 재활치료실 마저 지하에 있어서 창 밖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적어졌다. 엘리베이터는 항상 휠체어들로 꽉꽉 차있고 좁은 재활치료실에는 간병인과 환자 보호자들로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시끄럽고 혼잡했다.


종합병원이 아닌 재활병원이기에 재활의학과 의사 외에 내과 의사만 있을 뿐이라 응급상황 발생 시에는 타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 생각도 불안감을 조성하는데 한 몫했던 것 같다. 기본적인 약은 상급병원 외래진료로 타와야 했고 이전 병원생활때와는 다른 여러 가지 불편함들이 생기니 언제나 긴장을 하고 있었다. 갈은 찬과 밥으로 식사를 하니 엄마의 혈당조절도 잘 되지 않아 새벽에 저혈당이 한 번씩 왔는데 이런저런 이유들로 예민하게만 지내야 했던 것이다.


한날 엄마가 새벽에 깨 또 뭐라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는 다시 잠들었다. 보호자 침대에 앉아 불이 꺼져 어스름히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얇은 커튼 하나 너머로는 다른 사람들이 있고 보호자 침대와 환자 침대 사이로는 사람이 겨우 옆으로 걸어 들어갈만한 공간만 있었다. 새벽이라 다들 잠에 든 숨소리만 들렸고 엄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적막하고도 어두운 공간에서 불현듯 다 끝내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엄마와 집으로 퇴원해서 모든 걸 끝낸다면?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 하는 참으로 못나고 못된 생각이었다. 불안감에 극에 달해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나를 잠식해 왔다.


엄마는 단기기억은 휘발성이었고 여전히 휠체어가 필요했다. 밥은 수저로 퍼먹지만 반찬은 먹을 줄 몰라 적절히 섞어줘야 했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재활은 일상생활로 복귀를 하기 위해서 한다고들 하지만 그 일상생활이란 게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너무 먼 별같이 느껴져 무서워졌던 것이다. 아직 나아가야 할 길은 너무 아득한데 호전되는 속도는 체감하지 못할 수준이니 (길게 보면 호전 됐다고 할 수 있지만 당장 체감상으로는 느껴지질 않았다) 언제까지 어떻게 버텨야 할지 암담했던 것이다. 내가 회사에 복귀 후 간병인이 엄마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한다고 해도,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나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인지는 안 됐다. 휴대폰 전화도 걸고 받는 것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새벽에 물끄러미 엄마를 보는데 만약 내가 복귀 후 간병인에게 구박을 당하면 어쩌나, 인터넷에서 보던 아주 극단적인 일들이 생각나면서 머릿속을 어지럽히면서 엄마도 그럴 바엔 그냥 끝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닿은 것이다. 엄마와 함께 끝을 맺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른 선택이 아닐까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엄마와의 자살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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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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