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벗어나기
프로야구팀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투수가 있다. 고등학교 때는 초고교급 투수로 불리며 메이저리그까지 저울질하던 투수였다.
마침내 선발 등판일이 되었다. 3만명의 만원 관중이 내지르는 함성은 천지에 진동했다.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포수의 사인이 마치 영화관 스크린에서 나오는 영상처럼 느껴진다. 그 날 나는 뭘 어떻게 공을 던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포수가 마운드로 와서 긴장하지 말라고 머리를 툭툭 쳐도 별 효과는 없다.
당황하면 왜 머리 속이 하얗게 되는 화이트 아웃이 생길까?
사람은 당황하게 되면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 이 때 우리 뇌의 전전두엽은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이 때 일시적으로 머리 속이 하얘지면서 합리적인 사고가 정지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게 되면 길을 걷고 있는데 큰 트럭이 달려드는 장면이 종종 보인다. 이때 주인공은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벌린 상태로 그 자리에 몸이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 있는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피할 생각을 미처 못하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 때 병사들의 증언도 이와 비슷하다.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총 하나 들고 적의 참호로 돌진해야했다.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기관총 세례와 철조망, 웅덩이 뿐이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하나씩 차례대로 죽어나갔다. 이 때 운좋게 생존한 병사들의 증언은 일치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내가 뛰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두려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옆에서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도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머리 속이 그냥 하얘졌다."
두려움과 공포, 긴장 속에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화이트 아웃(White-out) 현상을 겪는다.
누구나 긴장하면 화이트 아웃을 경험한다. 그러나 각자의 개인차는 꽤 크다.
당황하면 어쩔줄 몰라서 식은땀을 흘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회의 때 갑자기 질문이 들어오면 안절부절 못한다. 팀장이 지시하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 하게 된다.
- 중요한 지시사항을 놓치거나
- 자기도 모르게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대답하거나
-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거나
- 내가 아는 것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게 된다.
이들이 다르게 행동하는 이유는 아래 4가지 이유 때문이다. 특히 실패를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급속하게 얼어붙는다.
반면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금방 적응하여 자기 의견을 조리있게 말하고 오히려 상황을 본인이 리드하게 된다. 왜 이들은 화이트 아웃을 경험하지 않을까? 나도 화이트 아웃을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이트 아웃이 심하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운동선수들도 실전에만 들어가면 화이트 아웃을 겪는 경우가 있는데 심한 경우에는 개인 심리치료사를 고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직장인은 어떻게 화이트 아웃을 극복하면 좋을까?
긴장되는 그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도 정신을 되돌리기 어렵다. 오히려 더 큰 패닉에 빠져든다.
예전에 한 은퇴한 투수가 한 인터뷰 중에 제구력 관련된 질문이 있었다.
"제구가 안되는 날은 제구 잡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었나요?"
"제구 안되는 날은 뭘 어떻게 별짓을 다해도 안 잡히더라고요. 그때는 차라리 우리 팀 공격할 때 잠깐 잠을 잡니다"
직장인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 말고 그 순간을 최대한 피해 있자. 잠을 잘 수는 없지만 조금 뒤에 확인해서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사무실을 나오자. 그냥 바람 쐬면서 기분을 전환하다 보면 긴장이 풀어지고 머리 속이 다시 맑아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했던 순간들이 다 있다.
나는 대학에 입학했던 일, 군대에서 전역하던 날, 최종합격 통지 이메일을 받고 소리치던 일, 첫 아이가 태어났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머릿 속이 하얗게 변하려고 할 때, 내가 행복했던 그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그러면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 것이다. 편안한 마음이 들며 몸이 이완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은 불안할 때 따뜻하고 포근한 것을 찾게 된다. 1950년대에 할로우(Hollow)라는 심리학자는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다. 무서운 물건이 나타났을 때 아기 원숭이들은 반사적으로 헝겊으로 만든 폭식한 인형 원숭이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불안한 상태가 되면 내가 위안을 찾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게 된다. 그 대상은 내 행복했던 기억이 될 수 있다. 거기에서 사람은 포근함을 느끼고 위안을 얻게 된다.
등산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라면 갑자기 백두산에 오르라고 하면 지레 겁을 먹고 머리 속이 하얘질 것이다. 그러나 주말마다 한라산, 지리산 등 1500미터가 넘는 높은 산들을 자주 올라가봤다면 백두산이 마냥 오르기 힘든 산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전투에서 가장 잘 싸우는 정예병은 전투 경험 많은 병사다. 수많은 전투에서 싸워봤기 때문에 위기에서도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스포츠에는 '고기도 많이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다. 많이 우승해 본 선수가 큰 경기에서 긴장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직장인도 마찬가지이다. 회의나 보고, 그 밖의 돌발상황을 성공적으로 이겨낸 경험이 있다면 비슷한 상황이 올 때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매뉴얼이 머리 속에 있기에 몸이 바로 반응하게 된다.
작은 일부터 하면서 조그만 성공부터 경험해보자. 그런 것들이 쌓이면 성공 경험이 된다.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적군이 기습해왔다. 당장 아무거나 집어들고 싸우러 나가야 한다. 이 때 내 주변에 총이나 칼, 삽 이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거 들고 바로 나가면 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든 물어볼 수 있는 중요한 업무들은 기본 내용을 꼭 알아놓자. 영업 담당자라면 매출액, 판매 대수, 예상 실적은 바로 대답이 나오도록 알아두는 것이다. 인사 담당자라면 현재 사무직 인원 수, 올해 채용 인원 수, 임원, 팀장 수는 기억해 두는 것이다.
내가 유난히 쉽게 긴장하고 당황하는 성격이라면 ADHD와 같은 정서상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ADHD가 있어 쉽게 긴장하고 이 상태가 되면 화이트 아웃이 오게 된다.
확실한 것은 ADHD를 완화해주는 약인 아토목세틴을 복용했을 때 긴장을 덜하게 되고 화이트 아웃도 강도가 낮아지게 된다.
만일 너무 쉽게 긴장한다면 정신과를 방문해서 꼭 처방을 받도록 하자.
시중에 나와있는 책을 보면 스트레칭, 심호흡을 추천한다. 그러나 직장에서 그 급박한 순간에 스트레칭하고 심호흡을 할 수는 없다. 현실적인 처방이 아닌 것이다.
일단 시간을 벌자. 적군이 기습했을 때는 후퇴를 해서라도 반격할 시간을 최대한 벌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싸워봤자 이미 전의를 상실했기에 승리할 수 없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기분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자. 그리고 질문이 나올만한 것들은 미리 숙지해놓자. 내가 그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고 미리 준비되어 있으면 돌발상황이 와도 머리 속이 하얘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