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탈출하는 방법
예전 회의 때 있었던 일이다. 한참 PPT 발표 중인데, 듣고 있던 임원이 갑자기 진행자 PC로 다가왔다.
"내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런데 PPT 줄 간격이 너무 좁아. 이거 좀 고쳐야겠어"
그러고는 직접 줄 간격을 넓혔다. 회의 때 있던 사람들은 순간 당황해서 얼어붇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그걸 직접 고쳐야 하나, 그 임원이 참지 못하고 직접 고쳐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줄 간격에 대한 본인 기준이 있고 그게 강박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병상련이라고 나 역시 그런 강박이 많이 있기에 이해가 되었다,
(사례1) 내 핸드폰은 늘 충전이 100%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다. 가방 속에는 늘 충전기가 있고 카페를 가면 콘센트부터 찾는다.
(사례2) 걸음수 1만보를 늘 달성해야 한다. 하루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날은 밤 늦게라도 걸어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어떨 때는 폰을 흔들어서 억지로 목표를 달성할 때도 있다.
(사례3)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는 공유 자전거나 킥보드를 보면 참을 수가 없다. 출, 퇴근길에도 하나씩 정리해서 구석에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갖고 있는 대표적인 강박행동들이다. 사실 이것 말고도 많다. 그러나 밝히기 힘든 부분들도 있어 대표적인 몇 가지만 소개드린다.
얼마전에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강박증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하루에도 몇 십번씩 비누로 손을 씻는 사람, 밥을 먹을 때 정확히 몇 초마다 숫가락을 입에 넣어야 하는 사람 등 그 유형은 다양했다.
역사 속 인물들 중에서도 강박증을 보인 사람들이 있다. 세도정치 시대의 왕이었던 조선 순조는 수라상이 들어오면 밥그릇 속의 밥알이 몇 개인지 늘 세어 보았다고 한다. 정확히 오후 4시 정각에 동네를 산책했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도 강박증 성향을 갖고 있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해 계속 쌓아두는 저장강박증,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야 불안이 사라지는 확인강박증, 지저분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청결강박증 등 그 종류는 다양하다.
강박 유형은 다양하지만 회사에서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강박은 다음이 있다.
-계획대로 일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형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유형
-특정한 생각이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르면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유형
물론 누구나 위 특징은 가지고 있다. 정해진 순서에서 틀어지면 불편한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커서 다른 업무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이는 문제이다.
개인적인 특성이라고 치부하기 쉬운 강박증이지만 업무에 미치는 악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모든 강박증이 업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수준의 강박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가령 정리정돈에 대한 강박이나 시간관념에 대한 강박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일 처리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몇 번이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 하나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빨리 이메일을 보내지 못하고 5~6번씩 계속 읽고 또 읽고 있다면 수북하게 쌓인 업무들을 언제 다 처리할 것인가?
청결에 대한 강박이 있어 수시로 소독약을 자리 주변에 뿌리거나 악수를 기피하거나 하면 독특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회사에서 튀는 이미지는 결코 도움되지 않는다. 특히나 한국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정말 잘 들어맞는게 사실이다.
본인이 높은 직위에 있는 경우 자기 기준을 팀원들에게 강요하게 되고,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자기 기준에 벗어나는 것은 다 틀린 것이 된다. 그렇기에 도저히 못 참게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당연한 것이 타인에게는 이상하기 그지없고 고집으로만 느껴지게 된다
강박이 생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유전적인 부분도 있고 후천적으로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들은 후천적 요인의 경우 스트레스를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내 경험으로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경우 강박증의 정도는 더 심해지게 되었다. 강박행동에서 쾌감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스트레스를 잊고자 하는 것이다. 즉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어기제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편이었다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강박행동을 하게 되었고 이게 습관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은 노력으로 극복하기는 어렵다. 심한 경우는 의학적인 부분이 동반되어야 한다.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단어가 어려운데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강박을 느끼는 상황을 참고 견뎌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해진 계획대로 여행을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아무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시간표 없이 즉흥적으로 떠나보는 것이다. 의외로 재미있는걸 느끼게 된다.
일할 때도 분 단위로 촘촘하게 세운 계획을 때로는 헐겁게 세워보자. 그 사이에 커피 타임을 두거나 갑자기 들어올 업무를 위한 빈 공간을 두어도 업무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걸 느껴보자.
1만보 걸음수에 집착하던 시절, 이를 끊기 위해 과감하게 핸드폰을 바꿨을 때 걸음 수 앱을 지워버렸다. 그 이후로 걸음수에 집착하던 습관이 싹 없어져버렸다. 더 이상 핸드폰에 걸음수가 표시되지 않았을 때 처음 사흘은 불안했지만 그 이후에는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만약에 업무에 플래너를 사용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지워보는건 어떨까? 효율을 위한 기능이지만 되려 강박을 부추긴다면 과감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
아예 가족들에게 선포하라.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벌금을 내겠다고. 마치 몰래 담배 피다가 걸리면 벌금을 약속하는 것처럼 강박행동을 할 때마다 벌금을 내기로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 돈이 관련되면 강박증상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돈이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강박은 의지로 다스리기는 어렵다. 유전적인 성향도 크고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생활방식과 관련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강박을 굳이 없애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심각하지 않다면 남에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업무에 지장을 주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강박을 주는 원인을 제거해버리자. 그리고 그냥 그 상황을 버텨보자. 진짜 아무 일도 안 생긴다. 머릿 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냥 내버려두자. 야구선수가 실책 안하려고 하면 더 실책하게 된다. 그냥 떠오르던 말던 내버려두면 다른 바쁜 일이 파고드는 순간 곧바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