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탈출하기
나는 군 복무를 공군에서 하였다.
공군이라고 하면 드넓은 비행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내가 있었던 곳은 산 꼭대기에 있는 레이더 기지였다.
훈련소에서 레이더 특기를 받았기에 당연히 레이더 근무를 할 줄 알았는데 이게 왠일? 내가 막 자대 배치 되었을 때 당시 BX (공군에서는 군대 매점 PX를 BX라고 한다) 병사가 말년 병장이었는데, 내가 나이가 많고 차분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BX병이 되었다.
남들은 편한 보직이라고 부러워하기 쉽지만 나에게도 고충이 있었다. 당시 나는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서 고시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부사관 양해를 구하고 틈틈이 책을 보고 있었다.
문제는 수시로 물건 사러 병사들이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책을 보다가 걸려오는 전화 받아야 하고 물건 계산해야 하고... 한참 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 병사들 상대하다보면 친절해지지 못하고 예민해질 때가 많았다. 나중에 고참이 되서는 후임들이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하고 책만 들여다보는게 내 모습이었다.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다.
길 가는 사람 100명을 붙잡고 물어보자. 내가 불친절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까? 장담하는데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많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2012년 설문조사에서 자신이 못 생겼다고 응답한 비율은 13%에 불과했다는 결과가 있다. 적어도 나는 평균은 되거나 그 이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 잘 웃고 매너있게 행동하고 배려심 많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군대 시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내 이익과 직결되는 순간 친절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극히 불친절한 인간으로 돌변하는게 내 감춰진 모습이었다.
내게 별 손해가 없을 때는 친절하지만, 내 기분이 안 좋거나 내게 손해가 될때는
극히 불친절한 것이 내 진실된 모습이었다.
직장생활에서 친절한 사람은 적이 없게 된다. 직장생활 오래한 분들은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내 편은 만들지 못하더라도 절대 적은 만들지 말라고. 결정적일 때 내 발목을 잡는게 적이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물론 그래도 침 뱉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내가 먼저 반갑게 상대방을 맞아 주면 상대방도 그만큼 마음을 열게 된다. 인간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가 있기에 내가 호의를 베풀면 상대방은 그만큼 나도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실제로 옷가게에서 점원이 옆에서 하나하나 설명해가며 판매를 권유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판매량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처음 본 비즈니스 관계도 그러할진대 하루 8시간 이상을 같이 생활하는 팀원들 간 친절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대한 경우, 나중에 후회가 밀려오게 된다. 내가 그 때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되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이는 상대방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되어 나중에 필요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주눅들고 밑지고 들어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친절한 것이 중요하다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친절은 생각보다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막상 상황이 닥치면 불친절해지게 된다. 왜 그런 것일까?
내가 친절하게 대했을 때 상대방의 좋은 반응이 있어야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항상 그럴수는 없다.
가령 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 직원이다. 늘 웃으면서 손님들을 대하려고 하는데 가끔은 반말로 화내는 손님들도 있고, 담배를 사러 와서는 "몇 개 드릴까요?" 물어봐도 계속 "에쎼" 만 외쳐대는 개념 없는 손님들도 있다 (손님이 아니라 손놈이다)
이걸 몇 번 경험해보면 친절에 대한 기본 마인드가 달라지게 된다. 손님이란 그저 물건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더 이상 이런 사람들에게 내 호의를 베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내가 한참 다른 일에 정신없을 때 전화가 걸려오면 그것만큼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 없게 된다.
한참 보고서 작성하고 있는데, 방금 결재 완료된 전표 내역 수정해달라고 전화 오면 짜증이 밀려오게 된다. 그 전화를 친절하게 받을 수 있는 테레사 수녀 같은 마인드를 가진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심각하게 회의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시스템 장애 때문에 서버가 마비되었으니 와서 해결해달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일단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한숨부터 나올 것이다.
정보통신 자격증 취득 요건이 변경되어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자격증을 어떻게 취득하는지 물어본다고 하자. 처음 한 두 번은 친절하게 응대한다고 해도 열 명이 넘어가게 되면 슬슬 로봇처럼 자동응답기 틀어주듯이 귀찮은 말투로 응대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게임도 반복해서 하면 질리게 되어 있는데, 재미없는 업무를 수없이 반복한다면 지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해져야 한다. 나는 친절해야 내 평판이 더 올라가고 매출이 늘어나고 이런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다.
친절해지기 위한 방법이 내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더 친절해지기 위한 내 노력이 사실은 내 업무 효율을 올리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으로 불친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친절은 친절 마인드 교육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주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메뉴얼을 만들자. 내가 일일이 상대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메뉴얼에 따라 진행하고,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 경우만 연락하도록 일을 간소화하자.
위에서 언급한 정보통신 자격증 취득방법을 문의할 경우, 미리 신청방법 메뉴얼을 만드는 것이다. PPT로 만들어도 되고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가독성, 가시성을 높인다면 문의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업무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은 전화 받지 말고 업무를 수행하자. 문의에 응대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시간에는 문의에 집중하도록 하자.
그러면 업무가 겹쳐 방해받고 짜증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집중해야 하는 시간, 상대 업무에 응대하는 시간을 구분하면 업무 효율성도 높이고 불친절한 것도 막을 수 있다.
일할 때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은 업무량보다도 내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무례한 상황이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요즘은 감정 노동자 보호법이 있어 함부로 대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무례한 상황에 대해서는 보고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자.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할 필요 없다. 친절은 그걸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