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중요한 것을 위해 다른 것을 내려놓는 방법
내가 참 좋아하는 지하철 역이 하나 있다. 그 역은 바로 '옥수역'이다. 옥수역은 한강변에 위치한 역으로 3호선과 경의중앙선이 만나는 곳이다. 특히 3호선 승강장은 참 예쁘기만 하다.
뻥 뚫린 플랫폼에 유리천장과 주황색 철골 기둥이 절묘하게 타원형 역사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역사 바깥으로는 한강이 넘실 흐르고 강변북로로는 차들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심지어 곡선으로 된 역이라 역 전체의 모습을 사진 한 컷에 다 담아낼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뷰가 또 있겠는가?
이런 아름다운 뷰 덕택에 예전부터 옥수역은 CF나 드라마,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였다. 많은 연예인들이 옥수역 승강장에 서 있는 모습으로 프로필 사진을 찍었고, 럼블피쉬의 '으라차차', 왁스의 '지하철을 타고', KBS 드라마 '당신이 그리워질 때' 등 많은 뮤직비디오나 드라마에 이 역이 단골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멋있는 승강장의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다. 왜 볼 수 없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스크린 도어' 때문이다. 2010년 이후 지하철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전국 지하철 모든 역에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모든 승강장은 스크린 도어에 의해 철길과 플랫폼이 구분되었다.
옥수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아름답던 승강장은 두껍고 육중한 스크린 도어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제 옥수역은 전국의 수많은 다른 역들과 다를 바 없는 역이 되고 말았다. 그 뒤부터 이곳에서 작품을 찍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이 예쁜 옥수역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예쁜 역사가 더 중요할까? 시민들의 안전이 더 중요할까?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시민의 안전'이라고 답이 나올 것이다.
옥수역은 시민의 안전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아름다운 역사라는 다른 가치를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더 큰 가치를 위해 내 다른 가치를 과감하게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한지 알아보기로 한다.
예전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핵심 메뉴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한 식당 사장님이 있었다. 백종원 씨의 권유에 따라 미국 남부 전통 요리인 잠발라야를 주 메뉴로 정하기로 했다.
문제는 제대로 된 잠발라야를 조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사장님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시간을 잘 내려고 하지 않았다. 평일은 식당 운영하느라 바쁘고 자기가 배드민턴을 매주 주말마다 치고 있는데 배드민턴이 자기에게 너무나 중요한 취미라 배드민턴을 안 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장님이었다.
당시 백종원 씨가 어이없어하면서, 지금 식당 제대로 운영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느냐고 그 외 다른 것들을 즐길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조언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내려놓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 가치를 잘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나 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자기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경우 사람들은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정체성이 부정당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지 부조화, 즉 자신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가치와 반대되는 상황이나 정보를 접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의 가치를 더욱 정당화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90퍼센트의 확률로 1억을 벌 수 있지만, 10퍼센트의 확률에 걸리면 1억을 잃는 조건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이 조건을 과연 선호할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조건을 기피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무언가를 얻을 때의 기쁨보다 가진 것을 잃을 때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쌓아온 시간과 노력이 아깝기에 이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 개인의 가치는 종교, 정치, 출신 학교, 지역 등의 가치와 결합되어 있다. 내 가치를 바꾼 결과가 집단으로부터의 소외나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가치를 바꾸기는 어려워진다.
내 삶은 그 사회적 집단 속에서 펼쳤졌기에 그 가치를 버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놓지 못하게 된다.
사실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생각해 보자. 매일 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있어 달리기는 하루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발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이제 걸음을 내딛기조차 힘들어졌다. 이 사람은 고통을 이겨가며 계속 뛰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
절대 아닐 것이다. 내 기분 전환을 위해 매일 달리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픈 다리가 빨리 완쾌되는 게 더 중요한 가치이다. 다리가 회복되어야 제대로 뛸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하게 되면 건강해지기 위해 하는 달리기가 오히려 내 몸을 망치게 된다.
내가 가진 가치는 참 소중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 가치를 내려놔야 할 수도 있다. 글쓰기를 참 좋아하는데 하필 2주 동안 회사에서 긴급 업무로 비상이 걸린 상태이다. 이때 나는 글쓰기가 소중하다고 일은 하지 않고 글만 쓰고 있다면 그게 바람직한 일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글을 쓰며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참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훌륭하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생각하는 가치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그때는 더 중요한 가치를 따라야 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내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가 지켜온 신념이나 가치가 흔들릴 만큼 강력한 상황이 찾아올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효과적인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가진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바뀌게 된다. 수험생 때는 아침 6시 기상 후 8시까지 도서관에 도착하는 게 중요한 가치였겠지만, 직장인이 된 후에는 도서관에 정시에 도착하는 게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닌 것과 같다.
지금 내가 중시하는 가치들 간의 우선순위를 정해보자. 매일 아침 달리기가 중요하더라도 발목치료가 더 필요하다면 우선순위는 발목 이 치료가 더 앞서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본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일 때가 있다.
고시 합격이 목표일 때, 매일 밤 11시까지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하자. 그러나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휴식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다. 밤 11시까지 공부하는 것은 사실 목표가 아니라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요한 일이 생기는 경우, 내 가치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유연함이다.
대나무는 곧게 자라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태풍이 오면 부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휘어뜨린다. 그것은 대나무가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유연함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중에 나를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쪽을 선택하자. 다음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좋다.
Q) '10년 뒤의 내가 지금 이 상황을 회상한다면, 잘했다고 할까 아니면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후회하게 될까?'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선택을 다시 했을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지 생각해 보고 결정하면 좋다.
그 아름다운 옥수역이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닌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내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가 옥수역을 배경으로 버버리 코트를 입고 활짝 웃는 사진을 찍는 것이었는데 그 꿈은 낙동강에 오리알 떠내려가듯 싹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옥수역은 더 나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이라는 더 귀중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예쁜 역은 대한민국 곳곳에 많다. 아쉽기는 하지만 대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생명은 대안이 없다. 더 귀중한 가치를 위해 그보다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한 것이다.
우리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순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운동을 좋아하더라도 정말 내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거나 몸이 좋지 않다면 잠시 그 가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하자. 당장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잠시 내려놓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는 잠시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내려볼 수도 있는데 인생인 것이다. 그런 유연함을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