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직장인 살아남기
민수는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때 내가 왜 그랬던거지?" 한숨부터 나왔다.
초등학교 때 연필, 지우개, 노트를 늘 잃어버렸다. 어머니는 누가 민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께 학교 폭력을 당하는 것 같다고 신고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큰 소리로 외치셨다.
"다들 소지품에 손대지 마라. 도난당한 물건 조사를 시작하겠다. 민수 공책이랑 필기구 훔쳐간거 있으면 자수해라"
아이들은 수근거렸다. 우리 반에 도둑이 있다고? 그 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민수 노트랑 연필 내 책상 서랍 속에 있어!"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제마다 한 마디씩 했다.
"이 연필도 민수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민수 물건을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었다. 민수가 부주의해서 잃어버린 것이었다. 괜히 민수만 난처해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소리를 늘 달고 살아야만 했다. 소풍 날짜가 바뀌었다는 담임 선생님 말씀을 못 알아듣고 혼자 서울대공원에 간 적도 있었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애가 학교에 안왔다고 집에 전화를 했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해 '사오정'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를 학교로 호출했다. 수업시간에 늘 딴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창 밖을 보며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쳐다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날 민수는 집에서 먼지나도록 어머니에게 매를 맞아야만 했다.
고등학교 때는 OMR 카드에 답안을 밀려써서 100점 만점에 20점이 나온 적도 있었다. 중간고사 때 화학 과목에서 그만 답안지에 답을 밀려쓰고 말았다. 그 덕분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는 처참한 성적을 받아들게 되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우왕좌왕하다가 시험 종료 2분만에 급하게 OMR 카드에 답안을 표시했던게 실수의 원인이었다.
ADHD가 있음에도 공부는 꽤 잘했다. 원래 공부머리가 있기도 했고, 집안이 부유한 것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교육열이 강했던 어머니는 학교 활동에도 열심이었고 과외 선생님을 붙여 가며 늘 성적을 체크하였다.
무엇보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고 책을 좋아하던 것은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글쓰기를 잘하였다. 전국 논술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민수는 비록 ADHD가 있어 집중력은 약하지만 그걸 만회할 수 있는 다른 장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 덕분에 국내 최고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 발표 날 민수도 울고 어머니도 울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 최고의 날은 그 날이 아니었을까?
"오빠! 뭐 해? 아이 공부 안 시켜? 애들 공부는 항상 내 몫이야?"
와이프의 다그침에 민수는 공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ADHD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회사에서의 실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민수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더 집중하면, 더 신경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팀장 리더십 교육을 앞두고 팀장들에게 제공할 교재를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당장 내일 모레가 교육이다보니 정신없이 교재를 출력해서 구멍을 뚫고 스프링으로 교재를 제본했다.
교육 당일 쉬는 시간에, 한 팀장이 다가왔다.
"교재에 이런 내용이 있네요. 그런데 우리팀 올해 등급이 왜 C등급인가요?"
응? 이게 무슨 소리지? 교재를 보니 아뿔사..옆에 있는 팀인 인사팀 대외비 문서 한 장이 제본되어 있었다. 실수로 그 문서가 쓸려들어가서 같이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문서는 각 팀 별 평가 등급을 정리한 자료로, 극도로 민감한 내용이었다.
발칵 뒤집어졌다. 교재를 만들고 검수만 제대로 했으면 찾아낼 수 있었을텐데 그걸 안하는 바람에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난 것이다. 민수는 부랴부랴 교재 제본이 잘못된 것을 사과하고, 인사팀 문서라 본인은 모르는 내용이라고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건으로 시말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회사에서는 다양한 통신 관련 제품들을 개발하고 판매한다. 교육팀에서는 매 년 영업사원 대상으로 제품 교육을 실시하고 시험을 치뤘다. 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든 사람들은 승진 시 가점을 받을 수 있고 최신 태블릿 PC도 받을 수 있었다.
민수는 시험 응시자들을 대상으로 시험 안내 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시험 장소, 날짜, 소지품에 대한 이메일이었다. 메일을 보내고 10분 뒤, 한 응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첨부파일로 주신 문제는 저희들 참고하라고 보내주신 문제일까요?"
응?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지? 보낸 메일함을 찾아보니 아뿔사..문제은행에 담긴 전체 문제 파일을 보내버린 것이었다. 대형 사고였다. 문제가 유출된 것이다. 이거 팀장이 알면 나는 큰일난다. 어떻게든 막아야만 한다.
다행히 메일을 읽은 사람은 그 직원 포함 4명이었다. 얼른 발송 취소 버튼을 누르고 그 직원들에게 그 파일은 꼭 삭제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걱정이다. 이거 소문나면 어쩌지? 만약에 안 지우면 어쩌지? 3일 간은 도저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민수가 일하는 교육팀에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FM 스타일의 차장님이 계신다. 사실 좋게 말하면 원리원칙 주의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꽉 막힌 고지식한 사람이다.
차장님을 대하는 것은 매 번 큰 스트레스였다. 이건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건 저래서 마음에 안 들고.. 그렇다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기획팀에서 이동해 온 차장님은 보고서 쓰는 것은 잘해도 교육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핸디캡을 숨기기 위해 더 그러는 것만 같았다.
민수는 참다참다 못해 팀 동료에게 분노를 쏟아 놓았다.
"황 차장님과는 도저히 같이 일 못하겠어. 교육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거 짜증나"
아뿔사... 이 메시지를 차장님에게 잘못 보내고 말았다. 회사 메신저는 메시지를 삭제해도 상대방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차장님은 그 메시지를 보시고 얼굴이 빨개져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른다.
"야! 이게 무슨 소리야? 나랑 같이 일 못하겠다고? 내가 쥐뿔로 모르는 인간이라고?"
민수는 사과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이후로 그는 차장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회사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민수는 어느 새 40세이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하나 둘씩 팀장 자리를 꿰어차고 있었다. 그는 팀장은 커녕 당장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르는 비참한 운명이었다. 이렇게 직장생활하면 미래는 뻔했다. 지금은 호흡기를 달고 있는 중환자실의 환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회사에서 내 호흡기를 떼는 순간 나는 바로 저 세상으로 가고 마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회사 생활을 할 수는 없다. 내 문제점은 무엇일까? 꼭 고쳐나가자!'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이미 그에게는 중요한 업무는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보고서 작성이나 교육 기획 업무는 민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과장이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그 과장은 실세가 되어 있었고, 직간접적으로 업무 지시를 받는 터였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내가 바뀌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ADHD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위안을 삼고 있던게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회사는 민수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가 바뀌어여만 했다.
그 생각을 하며 민수를 종이에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내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바꿀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