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머물 수 있었던, 고요함이 스며든 한국여행.
5월의 제주도는 예상하지 못한, 계획조차 없던 여행처럼 어떤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 들뜬 마음으로, 나는 설렘을 가득 안고 한국여행을 시작했다.
15시간의 긴 비행은 지루할 틈도 없이 흘러갔다. 실컷 자고, 눈을 뜨면 2번의 식사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업데이트된 최신 한국 영화는 작은 스크린 너머로 지루했던 시간을 잊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하늘 위에서 보내며, 나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길고 긴 여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저 좋았다. 한국은 나에게 언제나 그런 곳이다.
캐나다에서 가까운 칸쿤이나 멕시코, 미국 여행을 여름휴가로 계획해 두었지만, 이렇게 한국에 다녀온 지 5개월 만에 다시 휴가를 한국여행으로 간다는 건 조금 특별했다.
가족과 함께 가는 갑작스러운 여행이었고, 캐나다에서 가까운 나라의 휴양지 보다 한국 가는 비용과 비행시간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국을 자주 못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시간으로 오후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을 향했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사람들이었다.
평일인데도 제주행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그들의 옷차림.
모두가 블랙, 화이트, 그리고 회색 계열의 무채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정해진 드레스코드처럼.
나는 평소에도 칼라옷을 즐겨 입기도 하고 또 여행자로 한국을 왔기에 휴양지 옷들로 가득 채웠지만,
그날도 가벼운 원피스에 햇살 같은 색들을 입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나만 혼자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한국의 분위기는 이런 걸까?'
무채색으로 덮인 공항 한복판에서 나는 잠시, 나의 색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이동하느라 한국의 공기를 제대로 느낄 틈도 없이 제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아침의 제주, 공기는 어딘가 뿌옇고 무거웠다
안개는 아닌 듯, 하늘 위에 얇은 막이 덮인 것처럼 시야가 흐렸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가 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이게 미세먼지일까?’ 날씨 앱을 열어보니, 화면에 선명하게 적힌 글자 — 대기질: 나쁨.
제주도가 이 정도라면, 다른 도시들은 어떨까. 5월의 한국은 온통 미세먼지로 가려진 듯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첫날의 제주도는 뜨거웠고, 햇볕이 강하게 내리쳐 온몸이 그새 새까맣게 탔다.
그제야 실감했다. 캐나다의 청명하고 투명한 공기, 그리고 맑은 하늘을 한국의 5월에 와서 알았다.
첫날의 숙소는 '함덕해수욕장'.
2년 전 제주를 찾았을 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도 좋았기에 이번엔 이틀 동안 머물기로 했다.
눈앞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제주의 푸른 바다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듯 자유로움을 건넸다.
그 바다를 바라보는 나는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순간의 온기를 느끼는 일. 그것이 내가 그곳에서 한 전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햇살처럼 천천히 흘렀고, 제주에서의 하루하루는 늘 바쁘고 생각이 많던 나에게 따뜻한 숨결 같은 쉼이 되어주었다.
올해 여행지로 꿈꾸었던 칸쿤보다 제주는 올 때마다 내 마음 한가득 여유와 아름다움을 채워주며,
비로소 온전해지는 자유를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제주가 좋다.
한국, 그리고 제주는 내게 평온과 여유라는 선물을 건네준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멍하니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차 한 잔의 온도를 오래 느끼고, 한 줄의 글을 천천히 적어 내려가는 그 모든 순간들이
이곳에선 무엇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제주도의 해변가를 걷다 보면 싱그러운 바다 내음이 바람에 실려오고, 제주의 밤은 더욱 깊고 아득했다.
푸른 바다가 숨 쉬는 섬, 제주는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하고 따스하다.
그 온기와 고요함이 나를 다시 이끌고,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나는 이곳, 제주로 향한다.
매일,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커피 향이 가득한 공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로 제주의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카페. 돌담 사이로 길게 뻗은 바람이 초록 나무들을 흔드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고,
그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히 내 앞에 머물렀다.
큰 창 너머로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 짙푸른 하늘, 그 아래 반짝이는 햇살 속의 시간은 정말이지, 햇살처럼 천천히 흘렀다
감각 있는 공간이 주는 특별한 분위기, 그 안에 스며든 아늑함에 마음이 저절로 느긋해졌다.
그곳에 꼭 어울리는 달콤한 디저트, 그리고 깊고 진한 한 잔의 커피는 하루의 여운을 더했다.
카페를 찾아다니고, 맛집을 탐험하는 여정조차 제주가 내게 건네준 가장 유쾌한 여유였다.
매일 두세 개의 카페 투어 중, 기억에 남는 카페가 있다.
배우 공유가 '카누' 커피 광고를 찍은 카페.
직접 내려주는 커피의 깊은 맛도 좋았지만, 한 잔의 커피를 정성껏 설명해 주고,
천천히 음미하며 마실 수 있었던 그 여유가 특별했다.
아마도 그날, 비 온 뒤 더욱 푸르러진 하늘과 짙게 물든 초록빛 나무들, 상쾌하고 시원해진 바람에 실려온 풀 내음 속에 커피 향이 조용히 스며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향기와 공기의 온도, 그리고 그날의 기분이 고스란히 어우러져 그곳은 단지 카페가 아니라
감각과 마음이 머물렀던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공간은 늘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날의 분위기, 날씨, 그리고 내 마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
그날의 그곳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장소는 ‘런던베이글 뮤지엄’이었다. 지나는 길에 긴 줄을 보고 ‘이렇게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문득 끌리듯 들어섰다.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모든 것이 놀랍도록 마음에 들었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센스 있는 소품 하나하나,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빼앗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웨이팅이 길었지만, 시그니처 베이글과 커피를 마주한 순간,
기다림은 오히려 설렘으로 바뀌었다. 맛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브랜딩에 눈길이 갔다.
섬세하게 배치된 디테일들, 하얀 유니폼과 두건, 스텝들이 입은 앞치마마저 갖고 싶을 만큼 감각적이었다.
웃음 가득한 직원들의 친절함, 갓 구운 베이글의 신선함, 그리고 공간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소품들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완성된 경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제주를 떠나는 마지막 날, 나는 다시 한번 그곳을 찾았다.
마지막까지 그 여운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제주에서의 7박은 나에게, 거센 파도 끝에 찾아온 잔잔한 물결 같았다.
바쁘고 소란스러웠던 일상 속에서 비로소 마음이 고요해지고, 나 자신에게 온전히 머물 수 있었던 시간.
바람에 실린 커피 향, 눈부신 바다의 빛,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 순간들이 지금도 내 안에서 잔잔히 머물고 있다.
다시 흔들릴 날이 오더라도, 그 잔잔함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