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추석', '북극'
오래전 어릴 때. 텔레비에서 추석이라고 고속도로에 꽉 막혀 몇 시간이 걸린다는 방송을 볼 때마다 명절에 멀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나를 데려가려다 막내인 나의 땡깡에 누나가 양보해서 가게 된 추석날 외갓집이 나에게는 오래 남는 기억 중에 하나다.
처음 보는 하얀 원피스에 땡땡이 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끼고 찌고 걸고 최선을 다한 보석들로 휘감은 엄마는 어색한 구두굽으로 땅을 때리면 나를 잡아끌고 걸어 올라갔다.
"여기가 어뎁니까?"
한참을 도로가를 걸어 올라가서 열린 가게문틈 사이로 큰소리로 짜증을 섞인 외침을 날렸다.
"어디서 오셔서라? 왜 물어보는 가이 잉."
고개도 돌리지 않고 까던 콩나물대가리를 던지며 대꾸한다.
"큰오빠네 집이 백구면사무소라 택시 타고 왔는디 아닌 거 같아서라 그랑께여."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가게아주머니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경상도 아지메에서 전라도 아가씨로 금방 바뀌게 했다.
"아따! 친정왔는갑만. 우짠데 여는 금구면이라잉."
전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부터 택시기사의 흘끔거리는 눈빛과 우스개소리는 내 손을 자꾸 엄마의 치마를 내리게 했다. 분명 백구면이라고 했고 백구면 다 왔다는 말에 웃으며 비싼 택시비를 치르고 내렸지만 나와 있어야 할 막내 외삼촌도 백구면사무소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공중전화로 통화 후 한참을 지나 온 다섯째 외삼촌과 외숙모는 웃으며 엄마와 나를 태워 큰외삼촌 집으로 향했다. 창문에 비치는 석양은 곧 어둠을 불러왔고 차창 너머 보이는 것은 까만 논 뿐이었다. 멈춰 선 곳에선 개구리 소리가 신기하게 계속 들려왔고 까만 논을 옆으로 가로등이 있는 골목을 굽이 굽이 들어가니 끄트막에 녹슨 철대문이 열려 있었고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마중 나오고 있었다.
나도 두 딸을 데리고 찾은 추석날.
"이윤아 고모 좀 있으면 올 텐데 벌써 가나?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되겠나?"
할매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나만 쳐다보는 이윤이와 이우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엄마 딸과 며느리는 마주치지 않는 게 좋다니깐. 자꾸 그러네. 이윤이도 이우도 자기 엄마 보러 가야지."
결혼 후 얼마 안 된 명절날 누나에게 호되게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누나는 갓 태어난 이윤이를 보고 싶어서 처가집을 다음날 가면 안 되냐고 묻는 말에 해준 대답이었다. 지금은 없는 며느리지만 이윤이도 엄마를 보러 가야 하니 할매는 더 붙잡지는 않는다. 올해는 왜 이리 긴 연휴인지 오히려 할매는 많이 해 둔 음식이 남을까 그게 걱정인 듯하다. 좀 있으면 누나가족이 올 텐데 빨리 애들 보내고 못 잔 잠을 꺼내고 싶을 뿐이었다.
웃음소리가 마중 나왔어도 마당에 평상에도 좁은 거실에도 작은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가득했다. 전주 이 씨는 어른에게 꼭 절을 해야 한다는 아빠가 해 준 말이 생각나 외할머니부터 어른들에게 큰절을 몇 번을 했다. 처음 보는 외사촌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동생들 나랑 동갑인데 생일이 빠른 서울 사는 누나도 둘이나 있었다. 혼자 이 씨라는 생각에 혼자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엄마 옆에만 있었다. 큰상이 몇 개나 되는지 여기저기서 일어나면 또 다른 사람이 앉아서 먹어야 하고 다 먹었음 빨리 자리를 비워줘야 하고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밥 먹는 상위에 술이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가 잠깐 나를 보며 마시면 안 되는데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예쁜 막내 이모가 한 말인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엄마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는 엄마의 모습에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닌 것 같았다. 외갓집 삼촌들과 이모들도 모두 앉아 있지 않고 서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나는 신기하게 바라봤었다.
누나는 가끔 나를 보면 맥주 한잔이라도 하려고 한다. 유일하게 술을 마시는 친정 식구 중 한 명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버지도 형도 술을 입에 대지 않으니 술 마시고 말 들어줄 사람은 동생인 나밖에 없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술을 끊어서 인지 근래 들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부를까 봐 잠 오는 척하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어릴 때 엄마가 명절에 외갓집을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외갓집의 분위기를 보고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이 궁금했고 누나를 보면서 어느 정도 추측을 할 수는 있었다. 남극의 펭귄이 북극의 곰에게 시집온 게 아닌가 싶다. 수많은 식구들과 왁자지껄 보내던 모습이 꼭 남극에 모여 사는 펭귄들 같았고 외롭게 각자 살아가는 북극의 곰처럼 멀리 떨어져 사는 엄마는 명절이면 얼마나 그리울까. 누나도 몇 년에 한 번 오게 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를 테지만 지금까지는 그럴 일은 없었다. 그때 내가 땡깡을 피우지 않고 누나가 따라갔더라면 누나는 항상 엄마와 함께 재미있는 명절을 보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