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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부엌에서 익어가는 하루

프롤로그

by rufina


며칠 전, 오슬로 근교에 사는 한 한국인 교민을 만났다.
노르웨이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되어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분인데, 이번 주말에 베르겐에 일이 있어 오신다 하여 직접 만나 뵙게 되었다.


우리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주로 어떤 음식 드세요?”
음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그녀가 이곳에서 어떻게 식사를 해결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거의 매일 한식을 해 먹어요.”
그녀는 한국에서 재료를 공수해 오기도 하고, 노르웨이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체 재료들을 활용해 요리한다고 했다.
그러곤 웃으며 덧붙였다.
“살다 보면 다 노하우가 생겨요. 어떻게든 먹고살게 돼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나 역시 어느새 나만의 방식으로 이곳에 적응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노르웨이에 왔을 때, 가장 큰 고민은 단연 '음식'이었다.
요리에 서툴렀던 나는, 레시피에 있는 재료가 하나라도 빠지면 요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추장과 된장만 딱 들고 온 나는, 뭔가를 해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고추장과 된장이 든 작은 통은 가방 속에서 묵직하게 잠들어 있었다.


한식이 그리울 때면,
'다른 나라에서는 한식 재료 구하기가 쉽다던데, 왜 여긴 이럴까?'
혼자서 투덜거리기도 했다.
오슬로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지만, 베르겐에서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렇게 재료가 없어 제대로 요리조차 하지 못할 때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처음엔 낯설던 재료들도 점차 친숙해졌고, 없으면 없는 대로 요리를 해내는 법을 터득했다.
가족과 지인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재료를 보내 받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노르웨이 식재료로 나만의 한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예컨대 매실액 대신 solbær 시럽으로 단맛을 내보기도 하고, sei를 이용해 생선 전을 부쳐보기도 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노르웨이 음식도 자연스럽게 내 식탁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엔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맛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결혼 전까지는 엄마의 밥상에 기대어 살던 내가,
이제는 낯선 땅의 부엌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하루 한 끼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진다.


거창한 상차림은 아니지만, 그 밥상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리움으로 시작된 요리는 어느새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삶의 소소한 활력이 되었다.


낯선 땅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익어갔다.
이제 그 조용한 기록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한다.
이 작은 이야기들이, 누군가의 식탁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고, 그들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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