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뛰드를 견딜 수 있다면 이미 취미생이 아니다
에뛰드는 연습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축구 게임을 뛰려면 드리블, 슛, 패스 등의 기초 연습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처럼 멋진 연주를 하려면 에뛰드를 주구장창 연습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기초는 너무나 중요하지만 너무나 지겹고 재미없고 하기 싫다. 건강을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는게 기본이란걸 알지만 그것조차 현대인은 못지키는걸. 어려운 곡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기초를 갈고 닦아야 하지만 기초를 연습하는게 너무 어려운 아이러니. 아니 내가 이렇게 에뛰드만 팔거면 전공을 시작했지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보통 취미 연주로 학원에 등록하거나 개인 레슨을 받을 때는 아주 간단한 곡, 주로 동요부터 연습한다. 그 곡들은 이미 내가 잘 알고있는 곡이고 악보도 쉬워서 첫 시간부터 제법 진도가 잘 나간다. 나는 초등학교때 피아노를 배운 기억으로 기초적인 악보 보는 눈은 있었기 때문에 처음 플루트 레슨 시간에 동요 모음곡을 쭉쭉 넘기면서 진도를 나갔다. 악보를 잘 보시네요, 손가락 잘 기억하시네요, 오 그거 맞아요 하는 선생님의 칭찬에 힘입어 나는 내가 숨겨진 음악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곡은 동요가 아니다. 나는 있어 보이는게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연주했을 때 듣는 사람들이 바로 아 이거 알아 하는 수준의 곡을 연주하고 싶었다. 옛 이야기의 욕심많은 부자처럼 1층은 필요 없으니 2층으로 된 집을 지어달라 요구하는 꼴이다. 처음에는 전공할 것도 아닌데 지금 정도도 충분하지 라고 만족했지만, 곡의 수준이 점점 올라갈수록 잘하고 싶은 의욕이 올라왔다. 그래서 더이상 정신승리도 안통하고 외면할 수도 없을때 나는 다시 에뛰드 악보를 펼쳤다.
샛노란 표지의 플루트 에뛰드 악보는 정말 재미없고 어려운 음들로만 가득했다. 스케일 하나당 연습해야 할 텅잉 방법이 8개씩이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살펴보려면 페이지를 서너장씩 넘겨야 했다. 그뿐인가 중간에 플랫이 두개씩 붙은 계이름이며, 화성단음계니 가락단음계니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 용어도 나오니 괜히 더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나는 이미 레슨도 받았고, 에뛰드 악보집도 샀고, 연습실도 왔는데 이걸 안하자니 그동안 투자한게 아깝다. 그래서 꾸역꾸역 할 수 있는 것 혹은 하고 싶은 것만 연습한다. 낮은 도는 소리가 잘 안나서 그냥 레부터 시작하고, 첫 시작은 할만했는데 너무 길고 뒷부분이 어려우니 그냥 중간까지만 한다. 레미레미 손가락 움직이는게 너무 힘드니 이건 안할거고, 여기서부터는 조표가 너무 많아 헷갈리니 앞부분만 할거다. 건강을 위해서는 골고루 먹어야 하지만, 30년이 넘게 편식하며 살아왔는데 도 제법 건강하게 살았다. 기본 연습도 아예 안하는 것 보다는 뭐라도 하는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 결국 이렇게 자기 합리화로 끝낸 연습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연습이 된다. 주말 한 시간을 투자해 연습실에 갔다 왔는데도 다음 레슨때 연습하셨나요라는 질문에는 어색한 웃음밖에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열심히 할걸 후회하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지 다짐하고, 같은 사이클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연습실에 가서 지난주에 중간 솔에서 멈춘 반음 스케일을 이어서 분다. 안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하는게 낫고, 운 좋은 날에는 별로 지겨운줄도 모르고 연습할 때도 있다. 생각을 버리고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뭔가 달라진 나의 소리나 손가락을 느낄 때가 온다. 진작 이렇게 열심히 할걸 후회하지만 어차피 이 열정도 얼마 안가 사그라들걸 안다. 그리고 또 똑같은 후회를 하겠지. 하지만 취미 연주자의 연습은 이렇게 발전한다. 지그재그로도 걸어도 앞으로 갈 수 있고, 절뚝거리며 걸어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간에 그 자리에 주저 앉든, 드러눕든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걸으면 된다. 혼자 걷는게 지겨우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걷나 따라하기도 하고, 먼저 간 사람이 끌어주는대로 가기도 한다. 어차피 내 목표는 모델처럼 걷는게 아니라 내 힘으로 계속 걷는 것이다. 이렇게 다짐해도 다음 연습때 에뛰드를 시작하기도 싫겠지만, 싫으면 싫은 대로 다른 연습을 할거다. 제멋대로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취미 연주자의 특권 아니겠어? 그러니까 일단 다음주도 연습실에 발을 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