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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Jul 31. 2016

노란 수박

잠 못 들 정도로 기쁘게 하는 것들

#1

수박은 수박이라고 부를 수 없다. 빨간 수박이라고 불러야 한다. 엉뚱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근거가 썩 없지는 않다.


며칠 전 일이다. 과일 챙겨 먹는 것을 좋아해서 3일에 한 번꼴로 마트에 들른다. 과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취향의 폭이 넓지는 않다. 키위, 자두, 멜론, 수박, 파인애플, 라즈베리 정도가 전부다. 습관적으로 키위 대여섯 개랑 탄산수에 띄워먹을 레몬 두 개를 고른다. 고개를 치켜세운다. 계산대로 향한다.


묘한 이질감이 든다. 고개를 숙여보니 수박이랑 수박인 척하는 뭔가가 같이 있다.



"WATERMELON YELOW EGYPT"


이건 도대체 어떤 식물인가 싶어서,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 여기가 중동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집트는 그렇게 멀지 않다. 딱히 신기한 과일도 아닐 것이다. 사진 찍는 모습을 한국으로 치면, 신도림 이마트에서 딸기 보고 놀란 러시아 사람이 사진 찍는 모습이렷다. 회사에서 부장님들에게 신기하다고 말씀드렸다. 싱겁게도, 이미 드셔보셨다고 한다.


중요한 건, 이미 2년 전부터 그 마트에 있었다고 한다. 내가 여기에 온 지 1년 하고도 절반이 되었는데, 여태 몰랐다. 신경 써서 열심히 찾지 않으면 생각보다 보기 어렵다. 찾았다 요 놈.


#2

오늘같이 기분이 좋은 날엔 쉽게 잠들 수가 없다.


회사에서 사고 친 걸 수습할 실마리가 보인다든지, 2주 전에 본 문장 하나가 50번을 생각해도 참 괜찮다든지, 쟁여놓은 탄산수가 유난히 기분 좋게 톡톡 쏜다든지, 맨날 쓰던 물건에 배려심 있는 디테일이 눈에 들어온다든지, 전에 스카이프로 잠깐 이야기하자고 했던 친구 마음이 가만 생각하니 참 이쁘다든지, 아니면 제목만 보고도 괜찮았던 책이 마침 평이 좋다든지.


#3

그 목록을 찬찬히 짚어보면, 정작 뭇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좇는 어마어마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은 '노란 수박'이다. 항상 근처 어딘가 있었는데 어느샌가 나타나 기쁘게 하는 그 무엇. 


행복이라는 표현은 거창해서 어딘가 부담스럽다. 오늘 같은 감사함으로 매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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