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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0 - 구상섬전

삼체와 연관이 없는데 왜 삼체 0이지? 출판사의 마케팅에 낚이다.

by 구르미


삼체가 넷플릭스 드라마로 나왔단 이야기를 듣고, 삼체 소설을 먼저 읽었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디오북으로 들었으니.


며칠을 시간 날 때마다 듣다 보니 보름 정도에 다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긴 이야기였지만 나름 몰입도가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이야기가 너무 건조하다는 점? 류츠신이란 작가가 엔지니어 출신이라 그런지 이론적인 부분에서 설명은 자세했지만 인물 간의 서사가 너무 부족했다. 왜 이래야 하지? 하는 의문점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면에서 책을 듣고 몇 달 후 보게 된 넷플릭스 드라마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큰 이야기는 삼체와 동일했지만, 등장인물 간의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오히려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본 것 같다. 결국 소설이란 전공 서적이 아닌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케팅이라고 해도 이건 사기 아닌가?


넷플릭스 삼체 시즌2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광고를 보게 됐다.


"삼체 유니버스의 시작, 마침내 한국 출간"


제목도 심지어 삼체 0이다. 독자들에게 삼체의 프리퀄인가 하는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바로 주문하고 읽어본 순간. 너무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첫째, 이 책은 삼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었고 삼체 보다 먼저 출판 됐다. (2005년, 삼체는 2008년)

둘째, 이 책의 이야기는 삼체와 연관이 없다. (특히 구상섬전 자체에서는 없다. 그나마 있다면 작가의 후기에서 관찰자를 외계인이 아닐까 언급한 정도?)

셋째, 이 책의 내용을 몰라도 삼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넷째, 전 세계 어디에도 구상섬전을 삼체 0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곳은 없다.

다섯째, 삼체와 구상섬전은 출판사가 다르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은 삼체 0이 아닌 그냥 류츠신의 소설, 구상섬전이고,

출판사가 삼체의 인기에 편승해 작가의 예전 작품을 한국 출판 계약 하고, 인기를 끌었던 삼체와 엮어 삼체 0이라는 무리수로 삼체 팬을 낚았다.라고 난 생각한다.


거기에 띠지에 쓰여있는

"삼체의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삼체 0 : 구상섬전은 필수다."

라는 모 대학 교수의 서평은 개인적으로 정말 사기라고 생각한다.


위에도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삼체와 구상섬전은 연결된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구상섬전의 뒷부분에 외계인과 싸우는 부분이 나온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그나마 연계된 건 삼체 중에서 구상섬전을 써보면 어떨까라고 구상한 부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비중 있게 다루지도 않았다.)


이야기 자체는 류츠신스러운 무난한 SF 소설


삼체 이후 류츠신의 단편집도 찾아봤었는데, 류츠신은 매번 과학적인 콘셉트 하나를 잡아 이론을 덧붙여 이게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만 그 이론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사람 간의 이야기가 너무 빈약하다.


구상섬전 자체도 비슷한 플롯을 따른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구상섬전, 구형을 이루는 번개, 로 인해 슬픈 기억이 있고, 그에 몰입하게 되다가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 연구를 더 하게 되고, 다른 슬픔이 있는 여자 주인공과 함께 무기로 만드는 것을 노력하다가 난관에 부딪히지만, 또 다른 천재 과학자를 만나 많이 발전시키고 무기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결국 전 세계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내용이다.


삼체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그 자체가 류츠신스러운 전개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이론은 양자 현상인데, 그 부분을 독자에게 설명하려고 너무 많은 힘을 쏟은 게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설은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상상력의 대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과 비교되는 면이 많다. 베르나르도 매번 신기한 개념을 갖고 오지만, 그 중심은 사람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구상섬전은 내 생각엔 그냥 양자 현상 이야기인 것 같다.


크게 공감되지 않는 과한 설정에 읽다가 그만두려 했지만(차라리 복수라던지 누구를 살린다던지 하는건 공감이 되겠는데 동그란 번개에 안좋은 추억이 있다고 평생을 그 연구에 몰두한단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인 것 같다.),

혹시나 제목에 삼체0이라고 했는데 뭐라도 연관된게 있지 않을까 하고 끝까지 다 읽었다.

그런데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드물게 실망한 책이다.

나처럼 낚이지 않길 바라며 후기를 줄인다.


구르미 평점 : 1점 (무난한 류츠신스러운 SF 소설, 굳이 독자를 낚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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