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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이티브가 아니다

그들에게 난 그냥 영어 조금 할 줄 아는 동양인

by 구르미


영어를 시험으로만 배웠어요.


이직을 결심하고 헤드헌터를 통해 이력서를 제출했고, 다행히 서류가 통과된 후 면접 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그때 헤드헌터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매우 태연하게 말해줬다.

"이번 면접에서 같이 일하실 실무자 분과 팀장님이 참석하시는데요, 팀장님이 외국인이셔서 영어로 면접 준비하셔야 합니다."

헐, 그런 중요한 걸 이제 알려주시면 어떻게 하나요. 라며 화를 낼까 했지만, 괜히 약해 보이기 싫어서 "네, 그렇게 준비할게요."라고 쿨하게 답했다.

다행히 내가 기존에 했던 업무에 대한 질문이 많았고, 그 질문은 예상했었기에 크게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팀장님이 일부러 말도 천천히 해주시고, 배려해 주신 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실무자 면접이 끝나고 임원 면접을 마친 후 인사 채용담당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채용 후 바로는 점수를 따진 않으셔도 되는데, 진급을 위해선 OPIC 2등급 이상을 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급에 누락되실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사실 전 회사에서는 영어를 쓸 일이 없었다. 물론 가끔 외국인이 방문했을 때 어쭙잖은 영어로 공정을 설명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내 곁에는 영어를 매우 잘하는 네이티브 본사 직원이 있었고, 전공자는 아녔지만 경력이 많아서인지 내가 적당히 설명하면 그 말을 멋들어지게 포장해 줬었기에 크게 부담 가질 일이 없었기에 이런 분위기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 채용담당자가 말한 대로 OPIC를 준비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회사에서 대면 수업을 지원해 줬기에 거기에 참여해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OPIC 수업의 대부분은 Script 만들기였다.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고 그것을 Script로 만들고 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다른 분들이 쓴 Script를 보면 표현이 정말 어려웠다. 난생처음 듣는 표현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강사도 동일한 것을 지적했다.

"간혹 채점자도 어려울 수 있는 표현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너무 어려운 표현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에 맞는 편안한 표현을 쓰세요. 자신에 맞지 않는 표현을 쓰면 외우기도 어렵고, 결국 문장 전체로 보면 준비한 게 티가 납니다."

그렇다. 우리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며 지필시험의 답을 찾는데에 익숙해있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영어는 매우 어려운 '학문'이었다. 우리가 네이티브도 아닌데, 왜 꼭 네이티브처럼 표현을 써야 할까? 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 어제 사과 3개 먹는다


외국인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가끔 인간극장 같은 프로를 보면 한국말을 정말 유창하게 하는 동남아 직원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유창하더라도 외국인이기에, 일부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크게 거부감 없이 그게 무슨 뜻일지 이해하고 알아듣는다. 굳이 그 사람의 문법을 비난하기보다 자기 언어가 아님에도 상대방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을 대단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외국인에게 영어를 말할 때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단/복수, 시제, 수동태 등 머릿속에서 시험에 나오는 옳은 문장을 찾는 것처럼 수만 가지 고민을 하지만, 그들은 문법이 틀려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I eat 3 apple yesterday.'라고 기괴한 문법으로 말한다고 해도 그들은 찰떡같이 'I ate 3 apples yesterday.'라고 이해할 것이다.


내가 배울 때 딱 이 책이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초록책

요즘은 다르지만 예전에 영어를 배울 때 처음 봤던 책은 '성문 기초 영문법'이었다. 알파벳을 먼저 배우긴 했지만, 그다음으로 배웠던 건 주어, 동사, 목적어, 형용사였다. 그런데 외국인과 말하는 것만 생각해 보면 이게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인가 싶다. 마치 걸음마 하는 아이에게 달릴 때 먼저 닿아야 하는 발의 부위를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문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기초적인 문법을 알아야 문장도 만들고 대화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익 시험을 볼 때처럼 문법을 알아야만 대화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까? 만약 한국어의 문법이라면, 딱 봐도 한국인이 문법을 틀린다면 이상하게 보일 순 있지만, 외국인이라면, 누가 봐도 한국인이 아니라면 그렇게 크게 신경 않쓰지 않을까?


일단 말을 해야 한다. 뭐라도 말하면 분명 일부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정확한 문장을 말하려고 말을 하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관심법을 쓰지 않는 한 알아들을 방법이 없다. 당당하게, 내가 아는 표현으로, 아주 쉬운 단어로 웃으며 말해라. 그럼 그들도 우호적으로 듣고 이해해 줄 것이다.


잘못 알아듣고 헛소리 하는 게 더 창피하다


말하기와 더불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듣기이다. 그나마 듣기는 학창 시절 '듣기 평가'와 토익시험에서 'Listening'을 하면서 어느 정도 단련되긴 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들었던 목소리는 성우의 목소리다. 분명 난 똑바로 말했는데, '구글'이나 '시리'나 '카카오'나 '클로버' 등 음성 비서가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을 것이다. 물론 발음의 정확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지역마다 나이마다 말하는 목소리나 억양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항상 '표준'에만 익숙했던 우리에게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은 참 듣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나마 자주 보는 사람은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가 에이징되며 익숙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처음 보는 특이한 지역의 사람은 정말... 어렵다. 예전에 인도에서 온 고객사와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분명 말이 빠른 건 아니었는데, 진짜 말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뭔가 실례가 될까 봐 가급적 알아듣는 척했었는데, 아주 중요한 계약 사항을 논의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었다. 이때, 내 관리자였던 외국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영어로 말했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어로 썼다.)

팀장: 뭐라고 했는지 잘 못 알아들었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바로 질문을 다시 물어보세요. 오히려 잘 못 알아듣고 이상하게 답을 하면 대화 자체가 잘 이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나: 그럼 'Pardon me'나 'I beg your parden?'으로 말하면 되나요?

팀장: 그래도 되지만, 너무 직접적이니 'Could you rephrase your sentence?'로 말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나: 만약 대부분 알아들었는데, 일부만 못 알아들었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내가 영어에 미숙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요.

팀장: 그럴 때는 이해한 것을 기반으로 질문을 다시 만들어서 'Just to confirm, is this what you’re saying?', 'So, do you mean ~'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좋습니다. 요약하고 재구성해서 말하면 내가 대화를 잘 이해하고 있구나, 어느 부분을 이해 못했구나라고 상대방이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생각보다 많이 Could you rephrase~를 외치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상대방도 내가 어떤 말을 잘 못 알아듣는지 이해하게 되고 알아서 표현을 조정해 주었다. 대화가 한번 길을 잃으면 완전 미아가 되기 십상인데, 나 역시도 대화의 끈을 잃지 않아서 무리 없이 회의를 잘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이어지면서 내 기준으로 신기한 억양을 쓰는 외국인들과 대화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질문도 능력이고, 질문도 대화다. 내가 잘 못 들었다고 생각이 들면, 주저하지 말고 물어봐라. 그래야 꿀 먹은 벙어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해한 듯 가짜 리액션 하는 것도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 티가 난다. 자신 있게 물어보자. '저, 잘 모르겠는데, 다르게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왜냐면, 우리는 네이티브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 유치원생 정도로 보일지 모른다. 유치원생처럼 해맑게 물어보고, 해맑게 실수하자. 그럼 대화는 이어질 것이고 내 영어는 점점 더 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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