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delete 키가 간절해지는 순간.

감정 분리수거

by 본조잘


21세기를 사는 요즘 우리들은 빠른 것에 열광하고
빠른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고 살아간다.
로켓배송과 어느 인터넷 쇼핑이든 "오늘 출발"이라는 문구를 보며
'오케이~ 좋았어' 라며 읊조리기도 한다.

빨라지는 일처리 속에서 절대 빨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감정에 대한 생각과 처리.

특히나 부정적 경험에 의한 트라우마나 감정들은 빨리 없애고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절대 빠른 속도전으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AI도 아니고 기계적 프로세스가 탑재되지 못 한 인간이기에 어쩌면 당연하다. 마음 같아서는 내 몸 어딘가에 DELETE 키가 있어 누르는 순간 안 좋은 기억은 깨끗이 사라질 수 있었으면 하는 상상만 할 뿐이다.

15년간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던 누군가와 '손절'. 관계가 끝나버린 뒤 내게 남은 감정들은 마치 손에 들고 있다가 강렬한 태양빛에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다시 얼릴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채 손에 들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항상 참기만 했을까..'
'왜 내가 다 이해하고 넘어가면 괜찮다 생각했을까..'

무례했던 친구에 대한 원망보다 무례하도록 내버려 두고 방관한
내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고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는 관계라면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관계를 정리하고 내게 남은 감정은

분노,
미련,
죄책감,
안도,
슬픔

이라는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턱 막히는 단어들.
다섯 가지의 단어로 정리된 나의 감정들은 한꺼번에 비워버리고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그저 손절 후 내게 남은 이 부정적 감정들은 하나씩 쪼개어 하나하나 분리수거하듯 흘려보내야 했다.
그리고 비워진 자리엔 다른 감정과 생각들로 채웠다.

'한 명의 친구는 잃었지만 내 생각을 함께 해주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다른 친구가 내 곁에 함께 남아줬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인가..'


하면서 부정적인 것들과 상반되는 다른 생각들로 채워갔다.

그런 과정들이 다시 감정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었고 끝을 모르고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길고 긴 길 위에 손절이라는 작은 점 하나를 남기고 앞으로 다시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거슬리고 분명히 인식되겠지만 한참을 더 걸어간 뒤 돌아보면 그저 아득하게 흐려질 뿐이다.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들을 다급하게 처리하지 않기로 한 것은 분명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탈이 나고 소화불량이 오듯 감정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빠른 게 좋은 세상이라지만 감정을 다루는 일만큼은 각기 다른 속도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급하게 구겨 넣으며 정리한 서랍은 결국 다시 다 뒤집어서 정리해야 하는 것처럼 차분히 하나씩 꺼내어 정리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둘 것은 넣어두는 정리법이 감정에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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