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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혼일기 22화

그런 게 많이 혼란스러운가 봐

이혼일기, 다섯 번째 상담 episode 1.

by 검정멍멍이




─안녕하세요. ㅇㅇ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잘 지냈어요. 그러게요. 이제는 겨울에 입었던 옷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어릴 때 뭐가 많이 힘들었다고 그러는데,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몇 살 때 어디서 누구누구 있었고 무슨 얘기했고 그래서 내가 또 무슨 얘기했고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좀 해줄래요?




─음… 거의 다 말씀드린 것 같아요… 저번에 말했던 두 장면이 다예요?


─네. 그거 말고 또 다른 것들은 제가 지금 선생님하고 상담하는 시간 외에 제가 또 막 애써 아팠던 기억들을 파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그냥 오히려 일상에 집중하지 않으면 계속 괴로운 게 커지는 것 같으니까. 뭐 외면한다라기보다는 더 잘 사는 방법에 집중하는 게 좋잖아요. 아팠던 기억을 계속 파헤치는 것보다는...


파헤친다기보다는 안에 안 보려고 묻어놨던 거를 조금 이제 꺼내서 보고 정리하는 거죠. '갈무리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일상을 살면서는 굳이 안 그래도 되지만 여기서 이야기할 때는 또 굳이 어디다가 자리를 차지해서 묻어두고 갈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떠오르면 꺼내서 이제 하나하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괜찮죠.




─아! 저번에 어릴 적 제일 처음 기억이 뭐예요?라고 물어보셨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봤는데, 왜 예전 기억이 막 떠오르는 게 딱히 없네요.


─없어요?


─음... 없다기보다는 별로 좋았던 기억이 많이 없고...

─꼭 좋았던 걸 물어보는 게 아니야, 그냥 처음 떠오르는 나의 기억! 제일 어릴 적 첫 기억.


─아! 어제 친한 동생하고 전화를 했는데, 그 친구는 자기 4살 때부터 기억이 다 난대요.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기억이 나니 신기해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했어요. 그렇게 통화를 끊고 한번 기억을 거슬러봤어요. 저도 가만히 앉아 깊게 생각을 거듭해보니 어릴 때 동생을 되게 예뻐했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동생이 갓난아기일 때, 제가 동생 귀를 파줬던 기억이요.


─아유, 그러면 한 3살 때 기억이네. 갓난아기니까.

─모르겠어요. 아마... 그럴 수 있겠네요.
─엄마가 김치도 담그고 빨래도 했던, 부엌 옆 공간에 쭈그려 앉아 빨래를 하고 계셨어요. 저는 동생을 안고 귀를 귀를 파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생이 울었어요. 그러자 엄마가 놀란 얼굴로 저에게 달려오셨죠. 이게 제 인생 첫 기억인 것 같아요.


그 이후 기억은 없지만, 엄마가 옛날이야기를 하면 항상 해주시는 레퍼토리라 익히 잘 알고 있다. 이럴 적 나는 시골에 살았다. 큰 병원이래 봤자 의료원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선 동생 진료를 볼 수 없다고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옆 동네인, xx시에 있는 병원에 가서 동생 귀를 검사했어야 했다. 다행히 고막이 약간 찢어졌지만 청각에는 이상이 없는 수준이서 엄마가 안심했다고 했지만, 처음에 피가 많이 나서 동생 귀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엄마가 많이 걱정을 하셨다.


─아이고 놀랬겠다... 동생을 사랑해서 챙겨준다고 귀를 파주다가. 그죠?

─음... 엄마는 어떤 분이에요? 엄마와의 장면을 이야기해 줄래요?


─어, 엄마와의 장면...


─......


─엄마가 김치 만들었을 때 간 좀 보라고 했던 장면만 떠오르는데요?


─그게 선생님 몇 살쯤인가요?

─대충 10살 이전 기억이라고 해야 하겠죠? 뭐 김치를 여러 해 동안 많이 만들었을 거니까… 제가 옛날에 살던 집, 어릴 때 살던 그 집에서 엄마가 김치를 만들면 밥숟가락에 얹어 같이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아빠한테 혼날 때마다, 엄마는 기댈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정도?

─뭐, 딱히 어떤 장면이나 뭐가 떠오르진 않네요.




─아빠는 어떻게 혼냈어요? 떠오르는 구체적인 장면이 있나요?

─구체적인 장면? 구체적인 장면은... 아빠에 대한 어렸을 때 첫 기억은 항상 그거예요.

저번에 말씀드렸던 저녁에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잠그고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그거요. 그리고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 갔을 때가 떠올라요. 할머니가 저를 되게 귀여워하셨거든요.


─친할머니요?

─네. 친할머니요. 어릴 때 할머니집에 놀러 가면 할머니가 아빠한테 왜 애를 그렇게 기를 죽이냐 애를 혼내지 마라 막 그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고 그래서 항상 할머니 집에 가면 저만 할머니 옆에서 잤어요.
─아빠랑 안 자고 싶어서 부모님과 동생은 안방에 들어가서 잤었고, 할머니랑 할아버지 사이에 누워서 잤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할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아무튼 그 무렵 돌아가셨어요.


─아빠가 버럭버럭 소리치고 소리치고 때리기도 하셨나요?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부정적인 얘기로 하고...


─뭐라고 주로... 기억나는 게 있어요?


─기억나는 거는 중학생 때였을 거예요. 방에서 수학 공부를 공부를 하고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더니 제 방에 오셔서 한참 얘기했던 적이 있어요. 제가 풀고 있던 수학 문제를 풀어보라며 방법을 알려줬는데 제가 이해를 잘 못했어요. 그랬더니 왜 이걸 이해를 못 하냐, 이 쉬운 거를, 잘 좀 해봐! 다그치셨죠.

─결국 그때 울었어요. 아빠한테는 쉬웠겠죠. 그런데 저는 천상 문과생이고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아빠가 갑자기 제 방에 들어와서 못한다고 구박하는 상황도 싫었고 그 쉽다는 수학 문제 하나 이해 못 하는 제 자신이 싫었던 거 같아요. 그때 휴지 한통을 다 쓸 정도로 정말 서럽게 울었거든요.


─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아빠가 구박하고 막 못한다고 꾸짖으시던 그런 부정적인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그게 비단 저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엄마한테도 뭐라 하면서 자기의 화를 풀거나 혹은 자기의 화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했던 그런 집안 분위기 같은 게 있었었던 거 같아요. 전반적인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래요…


─어릴 적, 옛날집에서 혼자 방을 썼어요. 그 방에는 아빠의 작업도구, 공부 도구 같은 것이 있었어요. 또... TV도 하나 있었고요. 아마 작은 삼촌들이 와서 막 거기서 아마 거기서 좀 살았을 거예요. 그때 큰삼촌이 저한테 게임기를 사줬는데 막 그런 게임하면서 되게 혼자 방 안에서 그렇게 있었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뭔가 집이 '따뜻한 공간, 편안한 공간이다'라는 느낌은 없어요. 아니,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제가 지금 제가 저번에 막 선생님 앞에서 오열하면서 제일 괴로운 게 내가 이거였구나를 스스로 알게 됐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로 집은 나한테 편안할 수 없는 곳이 돼버렸구나. 내가 만든 가정에서조차... 그런 괴로움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딸한테 만큼은 집은 편하거나 재미있게 뛰어놀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느껴지게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내 집인데 그렇게 안 편하다니…

─저번 주에도 엄마 생신이셔서 부모님 집에 갔는데 편하지 않더라고요.

─어떤 느낌이에요?


─그냥 불편해요. 아빠랑 있는 것도 싫고 엄마만 있으면 편하긴 해요.
─아빠를 굉장히 불편하게 느낀다…

─아빠가 윽박지르는데 좀 무섭지 않게 느껴진 건 언제쯤부터예요?

─무섭지 않게 느껴진 거는… 음, 대학교 가면서부터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다른 지역에서 떨어져서 살았으니까.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그리고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았어요. 그때 처음 느꼈어요. 아! 나도 할 수 있구나! 맨날 병신 같다 못한다 그거밖에 안 되냐 이런 부정적인 소리를 듣지 않으니까 나도 할 수 있구나!

─그런 얘기를 계속하셨어요? 아버지가?


─계속했다기보다는… 어릴 적 제가 기억하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나 감정은 주로 부정적인 단어들로 묘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게 지배적이에요.


─실제로 얘기를 하신 거죠? 자주?


─그렇죠. 뭔가 본인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제가 못마땅하면 그랬던 거 같아요.


가슴속에서 뭔가 결연한 의지가 갑자기 솟구쳤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나를 하마터면 의식하지 못할 뻔했다.




─병신 같다. 뭐만 하면은… 병신 같다. 저것도 못한다. 어쩌고 저쩌고…


─아빠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요? 자식의 어떤 면이?


─모르죠 그러니까 그거를 물어보고 싶은 거죠. 저번에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얘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운을 띄워 놓는 것도 방법일 테니 이번에 가서 살짝 귀띔만.


─어! 편지도 얘기하고...


─맞아요. 선생님이 편지도 말씀하셨고 근데 그래서 운을 띄워볼까 했는데 차마 저마다의 방법으로 엄마, 아빠가 저렇게 살고 있는데 굳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할 말이 있어요. 하면서 말을 하는 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못 하고 왔는데…

─아니,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습니까? 애가 애지. 애가 애니까 모르지. 뭐가 그렇게 얼마나 대단하게 잘해야 되길래 그게 불만이었냐고 이 얘기 조만간에 무선 선생님하고 상담이 끝나면 꼭 가서 얘기하고 싶은데, 엄마 아빠랑 그런 얘기도 해보고 싶어요.

─근데 선생님 얘기를 이렇게 들어보면, 거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부정적이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굉장히 이렇게… 어머니 편인 느낌


─맞아요.


─이게 너무 다른데요.

─그런데! 어른이 되고 애를 낳아보니 얼마나 그 가장으로서의 무게라든가 뭐 먹고사는 문제 그런 것들이 겹치면서 이제는 오히려 아빠가 더 이해가 돼요.

─엄마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공감도 되고...


─엄마가 하는 뭐가 답답했을까요?




─예를 들어, 아빠가 A를 물어보면 대게 엄마는 B를 얘기하거나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시는 경향이 있거든요. 근데 어렸을 때는 아빠가 그렇게 엄마를 대하는 태도를 볼 때면, '엄마를 왜 이렇게 몰아세우는 거야?, 뭐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요.

─아빠가 뭐가 그렇게 답답했는지.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고 또 그렇게 이해가 안 돼서 맨날 화풀이를 했는지 이해가 너무 잘 되니까 공감이 많이 되는 거죠. 가장, 아빠로서의 무게감 외로움. 어디서 그거를 해소했을까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굴었어야 했을까?' 하는 마음도 여전히 있어요.

─저는 아빠와 달리 안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우리 딸한테 그렇게 안 하고 있으니까. 근데 이게 제가 저번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 울음이 터졌던 포인트 중에 하나였어요. '부모님의 갈등으로 인해 처절하게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내 가정에서는 절대 반복하지 않을 거야!' 하며 다짐했던 대로 일이 풀려가지 않으니까. 부모님과 반대로 살기 위해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해도 결국 삶이 생각했던 대로 안 되니까, 그게 너무 서럽게 속상한 거 같은 거죠. 지난 시간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느낀 가장 중요한 저의 한 맺힌 속 마음은 이 거 같아요.


─그럼 결국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거에서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그것 때문에 네가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는 거네. 그러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들은 그대로 두고 이 상황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해서 다르게 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옛날에 느꼈던 괴로움을 소유한테 주지 않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잖아 거기에 집중해 보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아무튼 아빠가 더 많이 이해는 되고요 이제는...

─근데 공감되지는 않고 용서를 한다거나 뭐 그때 왜 그랬냐를 묻지 않고서는 이해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엄마는 어렸을 때 항상 엄마 편이었고 나는 엄마만 믿었고 엄마만 따랐고 했는데 오히려 제 배우자와 너무나 다른 너무나 똑같은 그 모습 때문에 엄마가 밉고 답답하고 이해 안 되고 막 미쳐버리겠고 막 와이프랑 똑같은 모습 때문에 미쳐버리겠고 막 그런 감정이 더 들어서 엄마에 대한 모진 감정도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그러니까 이런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뒤흔드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 아닐까.


─그게 많이 혼란스러우세요?

네 혼란스럽다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감정일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봤지만, 아마 혼란스럽다가 맞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해서도 뭐 딱 둘은 아니지만 크게 보면 앞에서는 아버지에 대해서 반감이 나오고 그렇지만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이제 이해와 연민도도 다 숨겨져 있고 맞아요. 엄마에 대해서는 엄마 편이고 엄마 무조건적인 그런 데가 있지만 반면에 좀 실망스럽고 마음에 안 드는 불만스러운 그런 것들이 또 묻혀 있고


─네. 너무 이해 안 되고 답답하고 그러니까 아빠가 내가 어릴 때 왜 그렇게 엄마한테 했는지가 너무 이해가 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렸을 때 엄마만 내가 지지하고 엄마 편만 들었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너무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고 고집불통 같고... 막 그런 감정들이 지금 제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막 괴로워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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