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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혼일기 24화

그대로 이혼하면 배울 기회는 사라지겠죠

이혼일기, 다섯 번째 상담 episode 3.

by 검정멍멍이




─오늘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그동안 너무 재미없게 살았구나... 그냥 일만 계속... 일, 집, 일, 집... 마치 그게 내 인생의 전부인 것 마냥.

─개선, 개선, 개선.


누군가에 의해 꺾여버린 꽃이 안타까워 바라보듯 선생님이 날 보며 말을 더했다.




─네. 자꾸 스스로에게 채찍질만 하고, 즐긴답시고 하는 취미 활동들에서 조차 스트레스를 받고요. 오히려 나를 구속하게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만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번 주부터 계속 친한 친구와 지인들을 만나려고 해요. 요즘은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생각해 보니까 거의 3년을 혼자 고립돼서 살았네요. 내 속 사정과 괴로운 상황을 남들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치지만... 근데 선생님하고 상담하면서 뭔가 탁! 하고 줄이 끊어지듯 "말 안 하고 산 지 3년인데 뭐." 하며 가까운 지인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오히려 그렇게 '내가 잘 못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해 버리니까 더 속 편하네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근데 선생님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 이 사람과 헤어지면 되지' 말은 하면서도... 안에서는 뭔가 계속해서 의심하고 뭔가 고민할 것 같아요.


─......



─처음에 와서 저와 상담 시작할 무렵 왜 그런 얘기했잖아요. 이게 내 문제인가, 계속 이런 게 남고...

─어... 정말 선생님이 살아오면서 노력 많이 했고 많은 결실을 거두었겠지만, 선생님을 성격적으로 담아주고 예민함을 잘 케어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수치심을 작업할 수 있는 그런 길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은...

─뭔가 그걸 굉장히 찾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네...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라서 이 진실을 외면하기가 또 힘들어...




─이혼은 정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2년 뒤에 진짜 할 건데... 제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편으로는 '이혼하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정말 네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만약에 네가 지금 이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면, 나중에 행여나 다른 사람을 만나든 안 만난다면 정말 이 관계에 대해서 떳떳하게 노력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 이런 생각도 있는 거 같아요.

─근데 이런 자조 섞인 질문조차 엄청 의미는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만들어 놨어요. 왜냐하면 엄마, 아빠처럼 서로 안 맞는 걸 참아가면서 살 바에는 그냥 갈라서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딸에게 행복을 주면 되니까. 무엇보다 사람의 환경이 진짜 중요하잖아요. 이런 안 좋은 환경에서 계속 노출돼서 살 바에는 멀쩡한 환경에서 혼자 사는 게 차라리... 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채로 계속 이렇게 살면 오히려 딸한테도 부정적인 영향이 더 많이 갈 테니까요.


─선생님한테는 그게 쉽고 좋은 방법일 수 있지만, 분명한 건 딸에게는 엄청난 손실이죠.


─후... 그러게요. 그게 너무, 너무, 너무, 괴로워요.


─이미 말씀하셨듯이 아이한테 엄마라는 존재는 너무나 중요하고, 최선의 육아는 부부가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선생님이 조금 노력할 여지는 있죠. 선생님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듯 선생님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그게 제일 괴로운 포인트예요. 진짜 맞는 말씀이잖아요. 행복하게 부부가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한테는 최고의 행복인데... 그걸 이미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지난번 TV 보는 문제로 다퉜던 장면을 잠시 상상해 보면, 엄마가 와서 TV를 딱 껐을 때, 아빠도 아이도 얼음이 되는 게 느껴져요. 선생님은 소리 지르는 게 너무 큰 자극이지만 아빠나 아이한테는 엄마가 TV를 말없이 끄는 자체가 어마어마한 외침보다 더 큰 무서움인 것 같아요.


─그렇게 안 하면 와서 또 아침부터 싸우는 모습을 아이가 보게 되니까, 그게 저는 최선이었던 것 같긴 한데...


─다른 방법도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왜 그러는지 물어본다든지, 애를 아침에 케어하기 힘들지 물어보면서 다가갈 수 있는데...


─아침에 케어하는 게 힘들지 하며 다가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이젠 그러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선생님이 소통에 대해서 '갑옷'을 입고 있다. 왜 그런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민하게는 잘 다가가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선생님의 예민함을 온 집안에 뿌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겠죠.


─근데 그거를 딸에게는 어떻게든 안 하려고 참고 살고 있는데...


─네. 잘하고 있어요. 기특해요. 기특한데, 그 예민함이 자기를 향해서도 아마... 뭔가 이렇게 굉장히 예민하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칼날 같은 거거든요. 칼날에 이 시선을 계속 뿌리고 있고 아마 선생님 안으로도 뿌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이건 제가 모르는 얘기지만...


─아마 지금 이혼하지 않고 이렇게 참고 사는 환경에 노출돼서 그런 날카로운 칼날 같은 저의 모습이 더 심해질 수 있겠다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나는 우리 엄마,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하며 의지를 다지면서 그렇게 지금까지 20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죽기보다 싫었던 불행했던 가정환경이 지금 우리 딸이 살아가는 가정에서도 똑같이 목도하고 있으니 참 비참한 거죠. 내가 참을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막 뒤섞여 있으니까, 안 그래도 예민한 인간이 더 예민해 가지고 막 그러면 이 환경을 차라리 빨리 바꾸는 게 유일한 해결책...



제일 쉬운 해결책이죠. 잘라내는 게 제일 쉬운 거죠.



선생님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귀여운 고민쯤은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다시 들숨을 한껏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근데... 뭘 배우지는 못하죠. 그걸로 배울 기회가 사라지는 거죠.


거친 삶을 모두 다 버텨낸 어른의 말투였다. 세월을 견뎌 잘 익은 벼가 땅을 더 빤히 쳐다보듯 무겁지만 당연한 말이었다.


─...




─어쨌든 그런 면에서 선생님이 상담을 찾아오신 거는 선생님이 아마 그런 쉬운 해결책 말고 뭐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직관적인 게 있어서 아마 오시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네요. 뭔가 안에 칼날이 많네요.

─그런가 봐요.


─그게 아마 밖으로 자꾸 예민하게 이렇게 목소리도 거슬리고 TV 트는 것도 거슬리고 이렇게 개선이 안 되는 것도 거슬리고. 마음에 거슬리는 모든 게, 못마땅한 모든 게 개선돼야 될 걸로 보이는 그런 면으로도 갈 수도 있어요.


─맞는 말씀이에요.

─선생님만의 칼날이 뭔지 궁금해해 볼까요?


─제 안의 칼날이 뭔지 그 제 안의 칼날이 왜 만들어졌을까를 제가 원가족에,


─또... 원가족으로 비난을 이어가지 말고.


선생님이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채듯 재빨리 덧붙였다.



─아뇨, 아뇨. 원가족으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거는 아니지 하고 이제 온 것 같아요. 그래 그건 아니지...


나도 겸연쩍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는 내색을 하려 노력했다.




─맞아! 자기 걸로 봐야 돼요. 이제...


─근데 그러면 그게 뭔데라는 그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요.


─작업을 해봐야죠. 저도 모르죠. 엄마, 아빠는 또 그들의 엄마와 아빠가 또 있겠죠. 그 엄마 아빠가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고 이렇게 가면 아담과 이부까지 가지.

─심리학도 아직 모르는 게 99%예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당연히 선생님이 정답을 알려주시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정답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네가 어디로 가야 할 곳은 어디니? 빨리 찾지 않으면 계속 무너질 거야 하는 것만 같아요.


─조금 안심해 보세요. 너무 불안해하고 너무 급하고 막 이런 상태예요. 선생님 속이 그러니까 정말 편치가 않은 마음이 느껴져요.


─너무 마음이 편치 않아요. 계속. 그래서 딱 끊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아마 이 가정생활을 끝내도 부모님과의 사이가 편치 않으실 거예요. 아니! 혼자 있어도 편치 않아요... 이혼하고 혼자 계셔도 편치 않으실 거예요. 내면이 너무 이렇게 뭐랄까 ... 안에 가시가 너무 많은 거 같아.


─맞아요. 맞아요... 장미처럼.


─하여튼 자꾸 알아갈 모르는 상태에서 알아갈 마음을 내야지 결론을 빨리 내리고 이거예요. 단정하고 이러면 자꾸 막히겠죠 그죠?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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