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네 번째 상담 episode 5.
─호흡을 고르고 뭐가 떠오르나 보세요.
선생님이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말로 토닥이듯 담담히 위로하며 말을 이어갔다.
─떠오르는 거는 그냥 어쩌다 운명이... 참,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싶네요.
반쯤 다문 입을 억지로 열어 말을 이어갔다.
─운명?! 어떤 운명? 뭘 떠올리셨어요?
─속상할 때마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어요.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과 모질게 헤어져서 지금 이렇게 불행하게 살고 있는 걸까? 그래서 벌을 받는 걸까? 이런 생각도 하거든요. 정말 예쁘게 만났던 그 사람과 결혼해서 살았으면 참 잘 살았을 텐데. 최소한 싸우더라도 건강하게 해소하며 살았을 것 같은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엄마, 아빠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그렇게 발악을 하며 애를 썼는데, 결국 비슷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그게 참... 너무 괴로운 것 같네요.
─그게 고통스러우시구나.
─그래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미 깨어진 부부 관계가 슬픈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딸에 대한 미안함이 더 큰 것 같아요.
주먹을 꼭 쥐고 떨어지는 눈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의 선생님의 삶이, 선생님께서 그동안 엄마, 아빠랑 다르게 살려고 치열하게 노력한 그런 자부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그런가 봐요. 그거 같아요.
─어... 그런 느낌이 들어서 하루하루가 정말 괴로우시겠다. 뭔가 하루하루 삶이 그동안 노력해 온 거에, 이런 표현 쓰기 좀 그렇지만 '실패'로 여겨지니까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통 터지고, 막 안 보고 싶고. 그런 마음 드시겠어요... 제가 아직 잘 모르지만.
─네. 맞는 것 같아요. 조만간 부모님을 만나러 갈 건데 이 얘기를 해야 되나 아니면 상담을 하고 저 자신에 대해 더 이해를 했다는 확신을 갖고 마음의 정리가 끝나면 그때 대화를 꺼내야 하나 고민이 돼요.
─그냥 가볍게 한번 대화해 보세요.
─아... 가볍게 가볍게 안 될 것 같아요. 이게.
─그러면 미리 얘기를 하세요. 내가 그냥 얘기를 하려는데 내가 혹시 흥분할 수도 있는데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그러고 가볍게 얘기하세요. 그러다 흥분하면 흥분할 수 있다 했으니까 마음의 준비하시겠지
─이렇게 계속 괴로워하며 살 바에는 그냥 하는 게 더 맞겠죠?
─옳고 그런 건 없어요. 상담자는 절대 뭐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는 안 해요. 그냥 뭐 말씀하셔도 제가 볼 때는 부모님한테 큰 영향이 있을 것 같지 않고. 만약 그 일 그 후에 무슨 건강이 악화되거나 한다면 그건 우연이지, 이 일 때문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굉장히 폭력적으로 나가서 부모님께 위해를 가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다 큰 자식이 어릴 때 힘들었다는 얘기 하는데 뭐 그게 그렇게 부모님이 가슴이 아플까요?
─아니, 그것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걸로 인해서 지금 내 삶이 이렇게 됐다는 연결고리가 형성될 수 있으니까...
─그거는 선생님 생각에 프레임에 맞는 거지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저번에 엄마가 불쑥 집에 찾아오신 날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그날 엄마가 저에게 '그럼 너 이혼하고 앞으로 엄마 안 보고 살 수 있어?'라고 물어봤어요. 제가 예전부터 남편하고 이혼할 거라고 얘기했는데 갑자기 이제 와서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물었죠.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때도 앞으로 남편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자꾸 엄마가 개입하니까 지금 일이 더 커지고 이런 거 아니냐고요... 막 그런 얘기하던 와중에 앞으로 엄마를 안 보고 살 수 있냐고 물어보셨던 거예요.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냥 제가 이혼하지 말라고 설득이나 압박하고 싶었나 보죠...
─아! 너 계속 이럴 거면 나 너 안 본다 이런 의미예요?
─그게 너무 비참했어요. 그래서 제가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 누가 엄마 자식인데 지금 저 사람이랑 내가 이혼한다고 앞으로 나를 안 본다고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이혼 안 하고 갑자기 잘 살 것 같아?"
─그건 부모님들이 흔히 하시는 얘기잖아요. "너 이혼할 거면 나 너 안 봐 너 호적에서 파." 뭐 이런 소리들 많이 하시잖아요.
─아무튼 그때는 차마 얘기를 못했는데... '엄마 나 어렸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기억이 안 나? 잊은 거야 설마?' '엄마도 그때 괴로웠잖아. 나는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봉지를 뜯던 썩은 생선 같은 내 눈동자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이 나는데, 이제 와서 "이혼을 하면 앞으로 날 안 본다는 소리를 한다고?" 내가 이렇게 못 사는 게 결국에는 엄마, 아빠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볼 수도 있지 않아?'
─선생님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엄마한테 왜 이 말을 못 했을까 싶네요...
─일단 조만간 부모님 뵈러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는 싶으시잖아요. 그런데 너무 흥분할까 봐 걱정되잖아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인가요? 어릴 때 힘들었다는 얘기와 원망을 얘기해 보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 원망에 어느 정도까지 얘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망?... 시작하면 끝까지 다 얘기하고 싶어요. 얘길 시작하고 중간에 끊어가고 싶지 않아요. 할 거면 모든 걸 다 털어놓고 대화하면 좋겠어요.
─그래요? 그럼... 한번 글로 하고 싶은 얘기를 적어보시는 건 어때요?
─엄마, 아빠한테요?
─일단 선생님이 한번 써보는 거죠. 그리고 이걸 엄마와 아빠 입장에서 읽는다고 해보기도 하고요. 그리고 어느 정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한번 전달도 해보고... 그래야 끝까지 얘기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음... 그렇죠. 안 그러면 또 어쩔 수 없이 막 중구난방, 흥분해 갖고 말 나오는 대로 다 할 수 있으니까.
─또 적어도 부모님께 드리지 않는다 해도 저한테 가지고 와서 우리가 그걸 제가 좀 보면서 같이 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오늘 저에게 말씀해 주신 내용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어요. 내가 요즘 굉장히 고통스러운 이유는 내가 정말 부모님과 달리 행복하게 살기 위해 굉장히 치열하게 노력했는데, 결국엔 내가 부모님처럼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돼서 매일매일 고통스럽다. 그게 나의 정말 큰 업적이고 내 인생에 정말 그동안 노력해 온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오랜 노력이 모래성처럼 무너진 듯한 지금 상황이 너무 절망스럽다 하는 마음과 상황... 저는 이런 부분이 많이 이해가 갔어요.
─아... 그,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부모님께 가서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하며 어린애처럼 찡찡대고 싶은 걸까? 여태까지 별로 찡찡댄 적이 없거든요. 왜냐하면 엄마는 아빠한테 그렇게 맞고... 서로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며 싸우고. 엄마가 그 일로 가슴 아파 무너지지 않도록 저는 항상 어른스럽게 굴었어야 했었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가 내가 새롭게 꾸린 가정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부정적인 현실을 만든 장본인은 아니에요. 지금 제 가정의 일은 최소한 제가 선택한 것들 뿐이잖아요. 결국 내 선택으로 인한 괴로움일 테니... 그걸 알면서도 자꾸 어디 비난을 할 창구가 필요한가 봐요.
─지금 어떻게 들리냐 하면, 어릴 때 내가 무섭고, 괴롭고 내가 보는 게 너무 비참하고 막 이랬던 아이가... 자기를 돌보기보다는 엄마를 돌보기 위해서 어른스럽게 굴었던 그 아이가, 이제 어른이 돼서 내가 할 만큼 했어, 이젠 나도 목소리를 좀 내고 싶고 나도 나를 좀 돌보고 싶어라고 울부짖는 것 같네요.
─......
─후...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조용한 방 안엔 고요와 흐느낌 사이의 미세한 틈만 존재했다.
─뒤에 휴지 있어요.
─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거 오랜만이에요. 딸이 없었다면 차라리 이렇게 안 괴로웠을 것 같아요... 정말 그럴 거 같아요.
─선생님이 초아 걱정을 많이 하시고 그런 게, 선생님 마음에 이 아픔이 자꾸 초아를 통해서 이렇게 비치고 그러셨나 봐요.
─그런가 봐요.
우리 딸이 저처럼 괴로울까 봐...
그게 걱정되나 봐요.
─그렇게 살면 힘드니까... 제가 여태까지 살면서 쌓아왔던 자존심은 이거였나 봐요. 다르게 잘 살고 싶은 마음, 내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고 다르게 잘 살고 싶은 마음...
─아이고...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