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네 번째 상담 episode 4.
작년 가을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이후 바다에 잠겨버린 배, 인파에 압사되어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비극 그리고 비행기가 폭파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끔찍한 사고까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슬픈 일이 계속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게 문득 어떤 의미일까 치열하게 탐구하던 어느 밤이었다. 즐겨보는 EBS 다큐 프로그램에 암에 걸린 한 아저씨의 사연이 나왔다.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했고 모아놓은 연금이랑 은퇴 자금을 합쳐 시골에 내려가 아내랑 농사나 짓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치열하게 사느라 바빠 미뤄둔 해외여행도 가면서 그렇게 남은 삶을 여유롭게 살고 싶었다며... 코에 연결된 산소마스크와 검버섯이 번진 얼굴에 깡 말라버린 광대뼈가 도드라졌다. 그저 애처롭다 이외엔 달리 그를 형언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암에 걸려버렸네요...
그래서 이젠 그러고 싶어도 어쩔 수 없네요.
시한부 인생이라 얼마 살지도 못하네요."
그날 밤 "그런데 암에 걸려버렸네요, 그래서 어쩔 수 없네요."라는 아저씨의 담담한 말투는,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멍처럼 내 가슴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최근 친한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알게 됐어요. 암 3기라던데 항암 치료가 힘든지 살이 많이 빠졌더라고요...
─아이고 어떡해...
지난주 월요일, 정말 친한 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 소식에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친구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비니로 머리를 감싼 친구의 모습을 처음 봤다. 훌쩍 야윈 얼굴에 예전처럼 변함없이 장난기 많은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니 낯선 이질감이 서글픈 감정을 자극했다.
─췌장암이라는 게 치료하기 힘든 암 종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 친구랑 연락 안 한지 꽤 돼서 모르고 살았는데 그동안 그런 일이 있었네요. 암에 걸려서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가 다 빠질 정도로 힘든 상황인데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도대체 얼마나 힘들까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언급했던 여러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한 슬픈 이별들 그리고 최근 제 주변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으로 인해 문득 깨닫게 된 것 같아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괴로운 감정에 대해 부모님과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잘 잊고 살아왔다고 다짐했는데 그러지 못했나 봐. 어릴 적 상처들이 너무 괴로워서 엄마, 아빠와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에 나름 발버둥 치며 열심히 살아왔어요. 그런데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시작한 '내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싸우며 사는 게 지긋지긋해! 우리 모두가 불행했던 과거와 달리 행복한 가정을 꾸려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반대로 도망쳤지만 결국 똑같은 일이 벌어지니까 너무 미쳐버리겠어. 그래서 너무 괴로워...' 이런 말을 뱉으면 차라리 속 시원할 것 같아요. 내 마음의 짐을 부모님께 떠넘겨버리는 게 차라리 속이 후련할까 싶은 거죠.
─음... 떠넘겨질까요?
─물론 제가 떠넘긴다는 게,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게 '엄마, 아빠 탓이다'를 떠넘긴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요. 그렇게 하시면 선생님의 그 고통이 떠넘겨질까요?
─아마... 떠넘겨지진 않겠죠? 그 고통은 이제 제가 핸들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요. 이혼을 하더라도 그렇게 막 크게 동요될 것도 없고 핸들링할 수 있는데, 제가 진짜 괴로운 이유가 저의 어린 시절 원가족에서 겪었던 사건들 때문에 괴로운 거니까...
─예를 들면 이대로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다, 친한 친구들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돌아가신다고 가정하면, '다 큰 지금까지도 아파하고 있는 내 마음을 한 번도 터놓고 이야기해보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억울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뭐 얘기한다고 큰 얘기도 아니고요...
─아니요. 굉장히 큰 얘기죠.
─선생님이 느끼기에.
크게 내뱉은 한숨이 시계 초침 소리를 끊어내는 듯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굉장히 큰 얘기인데... 네, 근데 엄마, 아빠한테 일단 이 얘기부터 해야겠네 그럼... 부모님과 이런 이야기한다는 게 선생님으로서는 굉장한 모험이잖아요. 엄마가 너무 걱정할 것 같고, 얘기를 해도 되나 이게 지금 제일 큰 갈등이신 것 같아요.
─그렇죠.
─어... 만약에 얘기를 한다면 두 분 사이가 나빠질 것도 걱정된다고 하셨고. 또 걱정되는 게 뭘까요?
─예. 두 분 모두 약을 챙겨드시고 있던데, 연세가 있으시니까... 앞으로 뭐 얼마나 더 사신다고 굳이 이제 와서 자기들 마음속에서 묻어났을 그런 상처들을 내가 다시 파헤칠 이유가 있을까, 나 편하자고?
─혹시 건강이 안 좋아지실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마음이 안 좋아서... 건강이 안 좋아지실까 봐?...
─그렇죠.
─뭐 엄마, 아빠 나름대로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음...
─자기들도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려고... 먹여 살려야 할 자식들이 있으니까 갈라설 수 없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참 많았겠다 싶어요.
─그럼 요즘엔 어떻게 둘이 잘 지내세요?
─뭐 그냥 잘 지내요. 그래도 제가 봤을 때는 여전히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빠는 맨날 뭐 짜증 내고 앉아 있고 엄마도 그러시고. 여전히 서로 맞지도 않는 거 같은데...
─근데 뭐 나름의 그들의 엄마와 아빠의 방식인가 보죠.
─네, 두 분의 방식이 있으신 거죠? 그러면 선생님이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아빠 싸운 걸로 내가 굉장히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면 엄마, 아빠가 어떤 마음이실까요?
─괴롭겠죠. 그때 자기네들 감정이 떠오르고 그때 내 자식이 저렇게 힘들었구나, 지금도 저걸 괴로워하고 있구나 막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게 뭐 좀 마음은 아프겠지만, 막 괴로울까요?
─괴롭지 않을까요? 내 자식한테 내가 저런 상처를 줬다는 게 충분히 괴로울만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제가 지금 딸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실제 상황은 힘들죠.
─그러니까요. 그것만으로도 괴로워요.
─아! 아...
─제가 그러니까 얘한테 행복한 가정을 주지 못하는 상황을 내가 만들었다는 죄책감,,
─아... 이제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딸한테 미안함이 굉장히 클 때가 많으시고, 그게 진짜 괴롭군요.
─그렇죠. 그 마음이 어디서 왔냐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내가 너무 괴로웠으니까, 내가 겪은 괴로움을 우리 딸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런 부분에 엄청난 의지력이 있나 봐요.
─어... 그러네.
─그 목표가 엄청난 가봐요.
─그러네요.
─그러니까 자꾸 '엄마, 아빠로 인해 어린 내가 너무 상처를 크게 받았잖아, 너무 힘들었잖아. 근데 잊고 살고 있잖아. 근데 이제 내가 만든 가정에서도 상황이 비슷해지니까 내가 너무 괴로워... 나는 예전부터 엄마와 아빠랑 다르게 살 거라고 의지를 갖고 지금껏 살아왔어. 무조건 다르게 살 거고 엄마 같은 여자 만나지 않을 거고 아빠처럼 내 자식한테 모질게 하지 않을 거다.'라고 다짐하며 잘 살고 있었는데... 단 하나, 딸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은 그렇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데 이 가정은 그게 안 되네... 그러면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첫째,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사람을 너무 빨리 결혼을 결혼이 목적이 돼서 빨리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까. 두 번째, 이런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를 케어하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갈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그럼 그 능력은 왜 없을까? 아마... 엄마, 아빠 때문에. 이런 식으로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아요.
─네.
─한편으로는 '왜 자꾸 내가 '남 탓'을 하고 앉아 있지? 지금 벌어진 상황은 결국엔 내가 만든 거잖아. 엄마 아빠가 만들어 준 게 아니잖아. 내가 만들었으면 내 책임이잖아.' 하며 내적 갈등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만 같아요.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차올랐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선생님 얘기 들으니까... 아까 프레임을 많이 이렇게 짠다고 하셨는데 지금 그 프레임 안에서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이렇게, 이렇게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 같아요.
─좀 멈춰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네. 저도 이걸 멈추려고, 이런 '네모 프레임' 안에서 돌고 있는 생각의 꼬리를 멈추기 위해 결국 바깥에 있는 엄마와 아빠를 여기에 넣고 싶은 마음인가 싶기도 해요.
─"이 프레임"을 딱 해놓고 부모님께 얘기한다면 하고 가정했을 때의 상황도 "이 프레임대" 그대로 보시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프레임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 제가 여태까지 쌓아온 삶이... 아! 그러니까 아까 이거 같아요. 제가 여태까지 쌓아왔던 자부심은 이것뿐인가 봐요. 엄마 아빠와 다르게 살고 있다는 거.
─그런가 봐요... '엄마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야. 저렇게 싸우지 않을 거고 행복한 가정에서 내 자식한테는 따뜻한 부모가 될 거야.'
─이야... 정말 한 맺힌 말이네... 한이 많이 맺혀있는 말인 거 같아요.
─그건가 봐요.
─......
─근데 들어보니까... 선생님은 부모님처럼 되지 않으려고 정말 인생을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딸이 조금이라도 아파하면 굉장히 아프신 거잖아요.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목표는 다른 것일 수도 있으실 것 같아요.
─......
─후...
─머리로 말고 그냥 떠오르는 얘기 하세요. 눈물이 왜 나나요?
원망스러워요...
너무 원망스러워요. 미쳐버리겠어요.
엄마, 아빠한테 화가 나서.
─너무 화가 나요. 진짜... 근데 이 화가 좋을 게 없잖아요.
─아니, 프레임을 자꾸 만들지 마세요. 그냥 우리가 지금 받아들여야 될 거는 너무 화가 나고 원망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감정이 있다는 거예요.
─그냥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