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않기

이혼일기, 아홉 번째 상담 episode 1.

by 검정멍멍이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네요.


─그러게요. 미세먼지가 심하긴 하지만 날이 제법 따뜻해졌네요.



어색함과 반가움이 모두 담겨 있는 나의 인사말이었다.

이제 끝과 더 가까워져 버린 상담을 의식한 탓이었을까...




새로운 책을 읽었어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 한 때 베스트셀러이기도 했고 아들러 심리학을 소개하며 독자들을 위로하는 책 제목이 봄에 영산홍 꽃이 퍼져 나가듯 유행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난 일주일 동안 책에서 배운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지냈어요. 예전에 읽었을 땐 그냥 별생각 없이 다가왔던 내용들이 각별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도 했고요. '보통의 우리는' 평범함을 무능한 것과 동일시하는 건 아닌가에 대한 내용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더군요. 저부터 스스로 "평범함과 무능함을 동일시한 적은 없는가"에 대해 성찰해 봤고요. 또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해지는 것은 다른 건데 나는 마냥 심각하게만 살아왔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


─굉장히 자기 자신이 궁금하고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고 싶고 또 알고 싶고... 그러신 것 같네요.


─그런가 봐요.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못할까요?


─그게 인생이죠.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아가는걸요. 왜 그러신다고 생각하시는데요?


─글쎄요... 나를 이해하는 나를 이해해야 남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눈이 너무 무거워 잠시 호흡을 고르며 하늘 높이 연처럼 펄럭이는 생각을 붙잡아 속삭였다.



그래서 호기심을 핑계로
새로운 나를 발견하기 위한 탐구에 집착하는 걸까?




─선생님은 소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 끝에 의자 맞은편 벽에 걸린 "소통"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상담 내내 신경 쓰이던 그 주제로 꼭 한 번은 대화해보고 싶었던 터라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결국 난 소통을 못하기에 이렇게 상담까지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싶은 죄책감도 없진 않았기에...



─글쎄요.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정말 소통을 잘하고 싶지만 잘못하니까... 그래서 잘 저보다 더 잘하실 것 같은 선생님한테 좀 의견 구하고 싶은 거죠.


─저도 잘 못해요. 잘 못하지만 일단 들으려고 하는 거죠. 소통하고 싶으세요?

─그런가 봐요.

─책에서 읽었던 내용 중, "공동체 의식"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에너지를 전환해라." 아들러의 정의에서는 그렇게 쓰였던 것 같은데, 사실 뭐 정의가 저한테 크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제가 뭐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어쨌든 개념 자체는 와닿았어요. 나에 대해서 계속 집착하고 파고들면 들수록 타인과는 배척점을 만들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뭔가 선생님이 자기 안에 많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그 말에서 받으셨나 봐요. '아, 내 지향점은 밖으로구나, 다행이구나.' 이렇게?


─'그럴 수 있겠다 혹은 그러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네. 그게 다가오셨군요.


─근데 아직 '어떻게 하면 되지?' 하는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회사를 그만두려는 결심까지 하면서 삶의 쉼표를 찍고 생전 처음 상담도 받으면서 새로운 활동들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싶은 생각으로 확장되는 것 같아요.


─일상의 소중한 것들, 작은 행복들을 등한시하거나 놓치고 살았던 패턴이 꽤 오래돼서 문득 이 부분에 대해서 자각을 하다 보니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에 대해 지향점을 갖고 돌아보자." 하는 생각까지 이른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면 <미움받을 용기>를 다시 읽다 보니 그저 책의 내용에 심취해서 생각이 꽂혀가지고 더 집중하는 건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다른 시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여지를 줬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셨군요. 선생님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사실은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을 굉장히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잖아요. 자기에 대해서 충분히... 충분히까지는 어렵고, 하여튼 자기에 대해서 점점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를 알수록 자기와 소통이 되는 거기 때문에, 남과도 소통이 되고요. 어쩌면 우리는 자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점점 더 나 위주로 이해받기를 원할 수 있거든요? 자기를 좀 더 깊이 알수록 남도 훨씬 더 이해하게 되고 조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관심이라는 건 결국 사랑이니까. 남한테 관심을 가지게 돼요.


─그런 메시지가 계속 다가왔다는 거는 본인이 누군지 더 알고 싶고 그 방향으로 가야 될 것 같다는 얘기인 것 같아요. 왜 소크라테스가 그랬잖아 너 자신을 알라고...

─맞아요. 하하. 그 말 제가 맨날 지인들한테 강조했던 말인데...



'그래, 말은 쉽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서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자기를 보라고 하거든요. '나, 나, 나!' 하며 주장하라는 게 아니라 자기를 깊이 들여다봐라. 근데 그 자기는요, 머릿속으로 이렇게 짜인 자신이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는 거, 배운 거, 내가 아는 거 가지고 짜내는 자기가 아죠. 그거는 소위 '와꾸'라고 하죠. '틀, 프레임'이에요. 지금, 현재의 나 자신조차 모르는 나 그걸 '자기'라고 표현하거든요.



"너 자신을 알라" 할 때의 자신은 결국 '내가 모르는 나'를 얘기하는 거예요.



─내 안에 엄연히 있지만 결코 내가 잘 모르는 거... 생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나는 나를 모른다는 거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나는 나를 모른다라... '알 수 없다'는 전제를 이해하는 건가요?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나는 나로 살지만, 나를 모른다. 아마 죽을 때까지 '다'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마치 아기가 배밀이하듯이 계속해서 힘겹게 자신을 알려고 발버둥 치는 그 과정이 굉장히 의미 있다는 거죠. 그렇게 가는 길에서 남과 소통도 되고 그 길 위에서 남에게 관심도 점점 더 생기게 되고. 내가 뭘 해서 어떻게 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고 그 길을 가다 보면 소통도 되고 관심도 향하게 되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 저도 동의해요. 방송이든 책이든 여느 인기 많은 강의에서든, "지금 여기에 나로 존재하는 것" 이런 콘셉트에 대해서 되게 말을 많이 하잖아요? 누구나 이런 말을 들으면 딱히 부정하고 반박하기 어려운 말, 그냥 뭐 당연한 소리지 뭐 하는 좋은 말인데 이번에 이 책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이 생각나네요.



나는 두 손을 모아 호흡을 길게 내 뱉고 말을 이어갔다.


─인생은 찰나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이 아니고 점이고 나로 여기에 존재하려면 뭔가 거창한 목표만 집착하기보다 '그저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한다. 물론 거창한 목표는 필요 없으니 목표를 만들지 말라 그런 논지가 아니라, 목표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항상 염두하되 그걸 이루기 위해 현재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을 해라. 결과적으로 그런 찰나를 살다 보면 당연히 목표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의 뇌리에 박힌 핵심 메시지는 이거예요. 어쩌면 원했던 목표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근데 충실히 또 그 순간을 집중하고 몰입하고 즐기며 살았으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외부 요인에 집중하지 말고 그 찰나의 순간들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라.


각각의 찰나를 진지하게 살면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



찌이잉.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제가 메시지 하나 보내드렸어요.


─선생님이 폰에 쏠려있던 시선을 나에게 툭 던지며 말을 꺼냈다.


─이게 뭐예요?


─보면 도움이 되실 거 같아서요.


─네. 집에 가서 꼭 볼게요.





keyword
이전 03화'마음속에 있는 부모'를 잘 이해하고 잘 파악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