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팡’ 하고 터지는 순간이 있다.
나도 수업을 하다 보면, 그런 날이 종종 찾아온다.
어른도 그런데, 아이들은 없을까?
퇴근길, 몇 년 전 내 수업을 들었던 아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제는 예쁘고 의젓하게 성장해 있는 그 아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고,
성장은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몇 년 전, 그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가 가득한 아이였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었고,
그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아이는 언제나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의 다름’을 표현했다.
“효주야~ 왜 그러니?”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퉁명스럽게 대답한 아이는, 그로부터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책상을 쿵쿵, 세게 두드리며 의자까지 걷어차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아이를 들여다봤다.
볼펜으로 빼곡하게 적어놓은 알 수 없는 글씨들,
마치 자기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암호 같았다. 자세히 살피기 위해 더 가깝게 다가갔다.
펜이 나오지 않자, 연필로 덧썼지만, 색이 연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효주야, 오늘은 너가 힘든가 보구나. 그만하자.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자.”
그러고서는 나는 조용히 아이의 손을 잡고, 책을 정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아이.
그리고 또 다시 10분이 흘렀을까. 다소 진정된 아이가 나에게 ‘어떻게 해요’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효주야, 오늘은 왜 그랬니? 뭐가 그렇게 마음을 힘들게 했니?”
“효주, 여기는 여러 명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야.
너의 기분이 안 좋다고 해서 그렇게 행동하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피해가 돼.
그러고 여기는 서로가 배려하면서 지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미동도, 대답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한다.
그렇게 또 10분이 흘러가며,
‘그렇지, 쉽게 말할 수 있었으면 이런 행동도 하지 않았겠지…’
속으로 이렇게 나도 모르게 단정 지으며 생각하고 그 아이에게 다시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그제야 아이는 입을 열었다.
“집에 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그 아이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을까 하는 당혹스러움에,
나는 ‘지금의 시간’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아이는 ‘과거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
다시 물었지만, 아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업은 흐지부지 끝이 났다.
그 이후로도 아이는 비슷한 행동을 몇 차례 더 반복했다.
사람은 과거가 있어야 현재를 살고, 현재가 있어야 미래를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아이는 고통스러운 과거에 머무르며,
현재의 시간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잘 몰라서 화가 나고, 많이 틀려서 짜증이 나고,
다른 친구가 놀려서 화가 나고…’ 그렇게 수차례 감정의 시간을 겪으며 고통의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으며,
예전의 행동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중학교 3학년 무렵엔 긍정적인 감정의 태도로 말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샘, 제가 내일 100점짜리 시험지 가져 올게요~” 큰소리를 외치며 나갔던 그 아이는 그 다음날
약속을 지켰다. 기특하게도...
고등학생이 된 그 아이는 종종 지나가다 인사를 건넸고, 몇 해가 흐른 지금은 어느 정도 성숙한
성인의 모습으로 그 아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그 아아는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을까?
자신의 시간을 하나씩 하나씩 소중하게 만들어 갔을까?
수업을 하다 보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팡’ 하고 터지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아이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렵지 않을까.
내가 자라던 시절보다 지금의 세상은 더 편리하고, 여유로워졌다고들 하지만
어쩌면 여유 속에 아이들은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혼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몰라,
자신을 망치거나 무너지게 만드는 일도 생길 수도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시간 속에 하루하루 많은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쏟아지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때때로 아날로그의 속도처럼 흘러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굳이 모든 시간이 숫자만 보이는 디지털일 필요는 없다고..
천천히 느끼고, 찬찬히 바라보며, 가슴깊이 숨쉬고,
소리 내어 웃고,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고.
과학의 시간은 빠르게 흐를지 몰라도,
우리 삶의 시간은 조금 느릿하게 흘러도 괜찮다고,
그 느림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고,
그 작은 행복이 다가올 미래로,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나 또한, 나의 나이 들어감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장해가기를 바랄 것이다.
많지도 적지도 않았던 아픔의 시간들을 잘 묶어, 압축 파일처럼 저장해두고,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 않아도 그중 몇몇 행복의 시간만으로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며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아니 나아가고 싶다..
그 상처 또한 내 시간의 일부였음을 이해하며…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을 살아가지요.
그 시간은 여러 색을 띠기도 해요.
누군가에겐 검정의 시간,
누군가에겐 초록의 시간,
또 누군가에겐 빨강의 시간.
그리고 나에겐,
나의 시간이 흰색이길 바래요.
나의 시간을 색칠하며
다양한 색으로 물들여갈 수 있는,
나만의 시간.
똑같이 주어진 24시간 속에서,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과연 하루 중 몇 시간일까.
잠시만이라도 밝은 색으로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