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지금 암이라고?

영주권 그리고 레지던시 합격. 그런데 왜 지금 암이야?

by 티나

1. 미국 영주권자라 행복해요


영주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자그마한 초록색 카드가 안겨주는 신분의 안정감은 아무리 약국에서 진상 환자가 와서 욕을 해대도, 또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들을 주더라도 그런 고통조차 대수롭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내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미국에서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이 엄청난 안정감. 그리고 이제 무언가에 속박되어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말이다. 학교 공부를 다 마쳤고, 약사가 되었고, 미국 약사로 취직을 했고,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고 또 결혼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이룬 나의 20대는 치열했다.


영주권을 획득하고 바로 회사를 그만두면 마무리 인상을 나쁘게 남길 수 있으니 6개월에서 1년은 더 일해주고 그만두라는 선배들의 말을 따라 나는 6개월 후 제출할 사직서를 미리 썼다. 사직서를 닦아두니 내 몸의 반은 이미 회사를 나간 느낌이 들었고 행복감이 몰려왔다. 어두운 터널을 하염없이 걷고 있다가 이제 곧 밝은 빛이 보일 거라는 희망에 찬 나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꿈꾸던 병원에서 좀 더 전문적인 의료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임상약사의 길을 걷고 싶어졌다.


하지만 리테일 약사에서 임상 약사로 커리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 임상 약사 포지션은 1-2년의 레지던트 연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늦깎이 레지던트가 되기로 결심하고 레지던시를 준비했다. 퇴근을 한 후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있던 교과서들을 다시 펼쳐보기도 하고 예전 약대 교수님들께 연락을 드려 조언을 요청했다. 내 삶은 더 바빠졌고 그렇다고 환자들이 더 친절해진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나에게 더 잘해준 것도 아닌데도 이상하게 힘이 솟아났다. 공부가 재밌기까지 했다.


게다가 내 옆에는 든든한 배우자가 있었다. 내가 개떡이라고 외치면 맞장구 쳐주며 함께 해주는 그런 든든한 사람 말이다. 남편은 졸업 후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의 클리닉에서 1년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행복했다. 어서 양가 가족들이 있는 한국에 가서 다시금 인사를 드리고 한국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지만 아직 코로나는 맹위를 떨치고 있어서 아직은 먼 미래의 꿈이었다. 비록 가족들을 보지 못하고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지만 내가 영주권을 따고 레지던시를 준비하던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마음 한편에는 한국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아빠를 향한 미안함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2. 코로나 백신


코로나가 1년 가까이 장기화되면서 백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던 2020년 어느 겨울날, 회사에서 매 달 한 번씩 매니저들끼리 하는 미팅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 백신이 다음 주에 회사 약국으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뭐라고? 다음 주면 코로나 백신을 드디어 만나게 되는 거라고?


여담이지만 나는 약대 생활 2년 차에 갑자기 미국 약사법이 바뀌면서 약대생들과 약사들에게 백신을 주사하는 교육이 시작되어서 크게 당황한 1인이다. 나는 피를 보고 환부를 직접 만지는 것을 피하고자 약대를 선택했는데 갑자기 백신을 접종하라니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리테일 약국에서 취업하자 독감 백신 시즌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백신 1대면 처방전 10개 매출과 동일했기에 회사 입장에서 약국 매니저들에게 매 해 백신접종을 많이 하라고 압박을 주고는 했다. 내가 일한 약국은 처방전 수로 따지면 1주일에 800개 정도를 하는 약국으로 매우 작은 약국이었지만 매해 독감 백신 수는 1500건 정도였다. 이를 스탭 약사와 내가 둘이 나누어서 한다고 생각하면 750건의 백신을 매해 주는 셈이 된다. 이 일을 5년을 하다 보니 백신 주는 기계가 따로 없을 정도로 백신 도사가 되었다. 새 독감 주사를 매 해 가을에 배달받을 때마다 ‘아… 또 시작이군!’ 하며 한숨을 지었는데 코로나 백신을 배달받는다는 소식은 힘이 빠지는 소리가 아니고 잃어버렸던 일상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먼저 백신을 받게 된 약국에 가서 남편과 나는 함께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미국에서 1차 대응 요원 (First responders)에 해당하는 약사와 치과 의사인 우리 둘은 백신을 맨 처음 맞을 수 있는 직업군에 속했던 덕분이다. 특히 여러 사람들의 입 안을 치료해야 하는 남편이 많이 걱정되었는데 백신을 맞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이틀정도 백신 후유증으로 오한, 발열, 무기력함 등의 증상이 있었지만 코로나에 걸려 고생할 걸 생각하면 감당할 만한 증상이었다.


본격적으로 많은 약국들에 코로나 백신이 미국 전역으로 배달되자 약국 업무는 상상 초월할 정도로 바빠졌다. 약국 운영 시간에서 2시간 정도를 제외하고 매 10분에 1명씩 예약 시스템이 온라인으로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예약했다. 인터넷이 어려운 노인분들은 약국에 전화하면 나와 다른 약국 직원들이 예약을 도와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예약을 한 환자들이 정부에서 정한 백신 접종 자격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예약 시스템에서 접종 자격 요건에 관한 질문이 없다 보니 확인을 하는 업무는 약사인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전 주에 회사에서는 모든 약사들에게 이 접종 자격 요건을 확인하라는 서명을 하라고 했었다. 일단 서명을 한 이상 허투루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50명이 예약을 하면 20명 정도는 해당 그룹에 해당하지 않는 환자들이어서 돌려보내야 했다. 해당 그룹 군에 해당하여 백신을 맞는 환자들의 경우에는 신분증을 확인하고, 그 환자들이 보험이 있으면 보험 청구를 해야 했다. 백신은 미국 정부에서 무료로 약국에 나누어 주었지만 미국 약국들은 보험사에 청구하여 약사와 약국 보조원들의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약국 보조원은 약품을 수령하는 창구를 맡고 나는 백신을 맞으러 온 환자들을 상대하며 보험 청구를 하는 업무, 그리고 백신을 주는 업무를 담당했다. 접종 자격 요건에 미달한 환자들은 실망감에 나에게 화풀이를 했고 자격 요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체크인을 하는데 의료보험 정보는 왜 요구하며 따지기도 했다.


코로나 백신 마지막 예약이 끝나고 문 닫기 1시간 전부터는 가슴이 조마조마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바로 뚜껑을 열어서 유통기한이 몇 시간 남지 않은 백신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그룹군에 해당이 되든 말든 버려지는 백신이 최소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5분에 한 번씩 구내방송을 하고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돌려보낸 환자들에게 전화를 급히 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백신을 소진하고 나면 기진맥진이었다.


이 시기에 일하는 것이 더 고되고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진상 환자들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외로 순응적이었다. 조금 대기가 길어져도 이해했다. 코로나 백신을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주려는 약사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Thank you for all you do!”


이 말 한마디를 들으면 모든 맘고생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말의 힘은 이 시기에 정말 필요했던 것 같다.



3. 힘들게 레지던시 합격했는데 암 환자라고요?


코로나 백신으로 미국 리테일 약사들의 업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만둘 날이 다가오고 있던 나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운 좋게도 3군데 병원에서 레지던트 인터뷰 제안이 왔고 제1순위였던 병원에 합격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리테일 약국이라는 번데기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낸 나에게도 드디어 영주권에 이어 임상 약사로 거듭나려는 나비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이다.


레지던시에 합격했기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나의 마음은 홀가분했다. 레지던시에 합격하지 않았어도 예정대로 그만둘 예정이었지만 레지던시 합격 덕분에 나의 사직은 회사 내 다른 약국 매니저들에게도 금세 소문이 퍼졌다.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다른 약국 매니저들이 약국에 전화를 해서 너무 축하한다고 연락 주었다. 그 축하의 말들은 나만 이 구렁텅이에서 탈출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50-70%의 약사들은 번아웃을 겪고 있고 그중에 3분의 1은 직업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슬프게도 번아웃을 겪는 많은 약사들은 리테일 약사들이다. 리테일 약국은 아주 자주 내가 약사인지 고객 지원 센터 직원인지 혹은 맥도널드에서 버거 패티를 굽는 직원인지 혼동하는 일이 잦다. 사람을 돕는 것이 좋아 약사가 된 약사들이 대부분인데 터무니없는 환자들의 요구와 회사의 지시에 지쳐가고 만다. 나 또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약국의 파일들을 다 정리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필요한 여러 서류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파일에 라벨링을 하여 정리했고 다음 약국 매니저를 위해 짧은 메시지도 썼다. 그렇게 약국을 정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별로 나에게 관심도 없던 불친절한 스토어 매니저가 나를 불렀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문을 다시 열다가 손가락이 철 문 틈에 끼어버렸다. 업무시간이었기에 아픔을 참고 일하는데 통증이 너무 심하고 손가락이 보라색으로 점점 불어나서 결국 스탭 약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찍 퇴근했다. 급히 달려온 남편과 함께 응급실에 갔는데 손가락 골절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 사건이 앞으로 몰아칠 불행의 전조였다는 것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짐을 싸서 영주권 신청 이후 몇 년 간 가지 못했던 한국으로 갔다. 하늘 길은 열렸지만 한국에 입국한 후 2주 동안 격리를 해야 했다. 부모님과 함께 있지만 화장실도 따로 쓰고, 밥도 따로 먹고, 방에서만 있으니 이건 뭐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생활공간 안에서 지내면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마저도 좋았다. 2주 동안 방에서만 있다가 격리가 끝나고 처음 신발을 신는데 발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빠는 위암 수술 후 10킬로나 빠지셔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술과 담배를 끊으셔서인지 안색은 건강해 보이셨다. 암이 발견된 것은 안타깝지만 암이 더 퍼지기 전에 발견되어 수술을 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었다. 아빠가 이번 일을 계기로 건강한 습관을 들이셔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계셔주길 기도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살 때부터 미리 계획했던 것은 건강 검진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나의 몸은 무리의 무리를 거듭하고 있었고 그 무리가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두려웠다. 건강 검진이 비싸고 번거로운 미국에 비해 한국은 종합 검진을 한 곳에서 하루 안에 100만 원 안팎으로 다 끝낼 수 있기에 나 같은 해외 체류자에게 꼭 필요한 투자라고 생각이 들었다. 기본 혈액 검사부터 시작하여 소변 검사, 흉부 엑스레이, 심전도 검사, 갑상선 초음파, 위 내시경, 대장 내시경, 그리고 부인과 검사를 받았다. 나는 오랜 생리 불순으로 취업 후 5년 동안 호르몬제를 복용하고 있던 터라 유방 촬영과 더불어 유방 초음파도 추가로 검사했다.


건강 검진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새벽에 미국에서 레지던시를 시작할 병원에서 온 서류들을 보냈다. 병원 홈페이지에 실릴 헤드샷도 한국에 오자마자 예쁘게 찍어서 보냈다. 가족들과 아침을 먹고 오전 10시쯤 건강 검진을 한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유방 초음파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빨리 내원해주셔야 한다고 했다. 최대한 빠르게 예약을 잡고 간 병원에서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유방 엑스레이 촬영에서는 이상 소견이 없었는데 유방암으로 의심되는 종양이 초음파에서 발견되어 빨리 조직 검사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고 권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조직 검사 결과는 호르몬 양성 유방암이었다. 그 결과를 얘기하는 의사는 하루빨리 수술 날짜를 잡기를 권했다. 너무 놀라서 머리가 핑 돌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유체이탈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의사가 유방암에 관해 설명을 하는데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생각이 나면서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유방암에 관련된 수업을 듣고 있는 건가? 의사가 설명을 다 마치고 질문이 있냐고 물어봤다. 몇 분의 정적이 흘렀다. 긴 고심 끝에 나는 입을 떼었다. 레지던시가 바로 한 달 후 시작될 예정인 나는 절박하게 말했다. “선생님, 아직 암이 초기이니 1년 후에 수술받으면 안 될까요? 정말 중요한 레지던트 프로그램이 1달 후 시작되어서요.”


의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암이 발견된 이상 수술을 빨리 받으셔야 한다고… 그렇게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영주권이 잘 마무리되고 임상 약사로의 첫걸음을 내딛으려는 이 시기에 암 진단은 저에게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사실 암이 더 전이되어 아픈 증상들이 시작되기 전에 이렇게 초기에 암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그렇지만 감사함보다 왜 하필 저에게 암이 찾아왔는지 세상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혹시 암으로 저보다 더 큰 아픔을 겪으신 분들이 저의 글을 보고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개인마다 암 진단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다 다르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저의 이야기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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