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환자로 사는 법
슬픔의 5단계 (퀴블러-로스 변화곡선)
내 생애 처음 건강 검진 후 받은 유방암 진단은 정말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이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는 것 같은 1969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발표한 슬픔의 다섯 단계가 생각났다. 퀴블러-로스의 변화 곡선 모델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경험하는 슬픔의 다섯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델이지만 죽음 이외에도 실직, 이혼 같은 삶을 변화시키는 사건에 대하여 개인이 경험하는 감정적 단계들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언급된다. 이 모델은 감정의 단계를 부정, 분노, 협상, 우울, 그리고 수용까지의 총 5단계로 설명한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의 복잡성을 배제한 단순화된 이 모델은 여러 한계들이 있지만, 내가 유방암 진단 후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알아차리고 진단 내리기에 충분했다. 약사로 5년 간 근무하면서 많은 환자들과 소통해 왔지만 한 번도 환자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느닷없이 암환자가 되었다.
내가 암환자로 겪은 감정들
처음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였던 것 같다. 코로나 19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의료진으로 경험했던 후여서인지, 아니면 아빠의 위암 진단으로 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모든 인간들의 끝은 죽음이라는 한없이 허무한 사실은 일찍이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듣고 든 생각은 “올 것이 왔구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부모님의 죽음은, 또 나의 죽음은 어떨까를 수없이 상상했다. 그래서 불길하게 상상되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을 때, 나의 반응은 ‘아 그렇구나. 내가 암 환자가 됐구나. 죽음이 나에게 가까이 있구나.’였다.
그리고 곧 경험한 감정은 더욱 놀랍게도 두 번째 단계인 “협상”이었다. 내가 제안한 협상은 유방암 진단을 알렸던 의사에게 곧 중요한 레지던시를 앞두고 있으니 1년 후 수술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직업적 변화를 드디어 도약할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감정이 컸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유방암 수술이라는 두려운 일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을 최대한 미루고 싶던 나의 마음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려지게 하여 암 수술을 미루고 싶다는 제안을 하게 만든 것이다.
다음으로는 “부정”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인간 생애의 유한함을 자주 생각했던 나는 그 누구보다 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으려 했다. 정말이지 온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나?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열심히 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하필 내가 선택되었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가 확실히 해당되는 유방암의 위험 요소들 (5년간 에스트로겐이 포함된 호르몬제 복용, 운동 부족과 과체중, 이른 나이의 초경, 임신 경험이 없는 것, 한국 여성에게 흔한 치밀 유방)을 아무리 생각해도 왜 나에게 암이 발병했는지 정확하게 깨달음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조기 발견한 유방암은 생존율이 높기 때문에 빨리 수술을 받고 회복하여 건강 관리를 잘하면 남은 기대수명이 긴 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땅히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보다 안 좋은 상태에서 뒤늦게 암이 발견되어 정말 죽음이 코 앞에 있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은데 왜 나는 감사할 줄 모르고 화가 나는가?
그리고 결국 우울해졌다. 나의 신세가 슬퍼졌다. 한없이 땅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는 너무나 똑같이 그대로 있는데 암 진단 이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날씨가 맑으면 맑은 날씨가 야속해서 눈물이 나오고, 비가 오면 우중충한 날씨에 기분이 처져서 눈물이 나왔다.
이 감정들이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유방암 수술을 하기까지 1달여의 시간 동안 느낀 감정들이다. 퀴블러-로스의 변화 곡선처럼 단순하게 단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내가 느낀 슬픔의 감정들을 그 누군가가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했고 그 감정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의외로 위로를 주었다. 그래, 내가 겪은 감정들은 나 혼자만이 겪는 감정이 아닌 것이다.
그냥 운이 나쁜 것뿐이야
레지던시 프로그램 담당 약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건강 검진에서 유방암을 진단받아 빨리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 프로그램을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담당 약사는 내가 약대 4년 차에 실습을 담당했던 약사이다. 이 분은 나의 이메일을 받고 화상 미팅을 제안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현재 사정을 얘기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 선배 약사는 유방암 10년 차인 친한 약대 동기를 언급하면서 수술 잘 받고 회복해서 나중에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끝까지 눈물을 참으려 애썼지만 눈물이 터졌고 나는 엉엉 소리 내어 몇 분간 울기 시작했다. 표정과 목소리로 전해지는 그분의 위로에 나는 친정 엄마와 아빠 앞에서조차 강한 척 참고 있던 눈물을 토해냈다. 화상 통화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되었고 급히 다른 지원자가 나 대신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무렵, 남편은 미국에서 2달 남은 수련의 과정의 막바지였다. 프로그램 끝나고 1달 동안 한국에서 휴가를 갖고 그 후 페이닥터로 일할 치과에 이미 취직한 상태였다. 남편은 레지던시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여 프로그램을 좀 더 일찍 끝낼 수 있는지 물어봤고 병원 측의 감사한 협조덕에 예정보다 1달 일찍 프로그램을 마쳤다. 그리고 취직한 치과에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겠다고 알렸다. 나는 남편의 이런 결정에 반대를 하였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남편은 내가 수술을 받는 당일 미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했다. 친정 엄마는 한 사람이라도 돈을 벌어야지, 부부 둘 다 돈을 안 벌면 뭘 먹고살려고 그러느냐고 걱정하셨다. 시부모님들도 나에게 말씀은 안 하셨지만 졸업한 지 별로 안 된 신입 치과 의사가 취직된 직장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오겠다는 것이 여러모로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함께 있어주고 싶다고 했다. 코로나로 2주간의 의무 격리 때문에 수술 날 얼굴도 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멀리 미국에서 있는 것보다 좀 더 가까이 한국에서 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암 수술 전 날이 되어 세면도구, 속옷, 양말, 핸드폰 충전기, 슬리퍼 등의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1인 밖에 출입할 수 없는 규칙이 생겨 아빠와는 병원 앞에서 수술을 잘 받고 만나자고 눈물의 인사를 했고 친정 엄마와 함께 병원 입원 수속을 했다. 병원의 여러 직원들을 만나고 설명을 듣고 서명을 했다. 모든 상황들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들과 겹쳐서 이게 정말 나에게 일어나는 것인지 현실 분간이 되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서 “예”라고 대답은 하지만 정말 무슨 설명을 하는지 정확히 경청할 수 없었다. 여러 직원들이 나가고 엄마와 둘이 있게 되자 유방암 수술에 관한 책자를 열심히 읽어보았다. 열심히 읽어보니 상상이 되어서 더 무서워졌다. 그 무서움을 남편에게 털어놓자 남편은 나에게 여러 번 말했다. 내가 암에 걸린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그냥 인생의 슬롯머신을 돌리다가 확률이 낮은 암이 재수 없게 나온 거라고 말이다. 나는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으로 인해 잠이 오지 않던 나의 마음은 편해져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이윽고 수술 당일 아침, 나는 샤워를 깨끗이 하고 양 갈래로 머리를 고무줄로 묶고 수술을 기다렸다. 엄마가 나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었다. 수술 시간이 점점 가까워옴과 동시에 역으로 두려움이 흐려져갔다. '그래,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수술실로 이동하였다. 엘리베이터를 4번 정도 갈아타며 눈 위로 보이는 천장의 색도 여러 번 바뀌었고 조명 색도 하얀 형광등에서 노란 할로겐 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그리고 도착한 수술 대기실은 나와 같은 환자들이 40명은 더 있었다. 우리들은 공장 컨베이어벨트에서 조립을 기다리는 여러 부품들과도 같았다. 나는 이런 풍경 속에서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기다리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나의 이름과 생년월일, 어떤 수술을 받는지를 여러 번 확인하고 수술방으로 옮겨졌다. 이윽고 천장이 또 한 번 바뀌어서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조명이 있는 수술실이었다. 수술 가운을 입은 여러 의료진들이 나를 수술하기 위해 모인 이 방을 바라보았다. 나는 여러 의료 기기들이 즐비한 이 수술방의 정 가운데에 누워 주인공으로 있었다. 곧 마취제가 혈관 속으로 투여되었고 나는 3시간여의 수술을 받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 아침에 있었던 병실의 천장이 다시금 보였고 옆에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눈을 뜬 나를 보자마자 “아이고 깼구나. 많이 아프지? 수술 잘 되었단다! 수고했어!” 하셨다. 나는 “엄마!”하고 부르며 엄마를 안으려 했는데 수술 부위에서 마치 뭔가가 쏟아질 것 같은 통증에 “아!” 하고 소리가 나왔다. 나는 그저 깊은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내 몸에는 수술 자국이 생겼고 내가 느끼는 통증이 내 몸이 겪은 일을 말해주었다. 수술 부위를 꽉 압박해야 겨우 상체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통증이 상당했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세 시간 만에 내 몸에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래. 나 유방암 수술받은 게 맞네. 꿈이 아니었구나.
유방암 진단 후 4년 반이 흐르고 있는 지금까지도 저는 슬픔의 5단계를 여러 번 겪고 있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제가 암환자임을 수용하고 살아가지만 이따금씩 부정, 분노, 우울의 단계를 겪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이 슬픔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이 슬픔이 일어난 이유인 암이 왜 나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하고 싶고 이유를 찾고 싶지만 사실 딱히 이유가 없는, 어쩌다 운이 좋지 않아 재수 없게 암이 걸렸다는 남편의 말에 백번 공감하며 체념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불편함도 전혀 없고 신체에도 큰 변화가 없던 초기 암이기에 제가 배가 불러 그런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하던 제가 갑자기 암 환자가 되어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니 이 변화가 더 갑작스러웠을 것도 같습니다.
그 시절 혼란스러웠던 저에게 지금의 제가 가서 조금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듬뿍 담아 이 글을 썼습니다. 저와 비슷한, 또는 저보다 더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계신 여러 환자분들이 겪고 있는 슬픔을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 저는 지금 한층 성숙한 사람이 된 느낌입니다. 다음 주에는 암 수술 이후 치료를 받으며 지낸 시간을 나눌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